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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7 17:13 수정 : 2018.05.18 17:16

고명섭
논설위원

1971년 6월13일 <뉴욕 타임스>가 내보내기 시작한 ‘<펜타곤 문서> 보도’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를 뒤흔들었다. 전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비밀리에 작성한 <펜타곤 문서>는 역대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거짓 정보를 만들어 국민을 속였음을, 이 전쟁이 한 편의 거대한 기만극임을 폭로했다. 닉슨은 <뉴욕 타임스> 보도를 막으려고 위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펜타곤 문서>를 따로 입수한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의 바통을 이어받고 경쟁지들이 연합 공격에 나서자 상황이 뒤집혔다. 위기에 몰린 닉슨을 구한 것은 태평양 건너편에서 온 소식이었다.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7월9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만났다. 닉슨은 이듬해 2월 중국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열었다. 닉슨은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낙승했다. 닉슨의 내부 위기가 미-중 관계 정상화를 촉진한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해묵은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닉슨 시절과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초기부터 러시아·섹스 추문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대통령 지지율은 한때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중간선거가 다가오면서 트럼프의 위기는 더욱 커졌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대통령 자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자신의 목을 겨누는 특별검사의 칼과 언론의 계속되는 추문 폭격에서 탈출해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킬 지렛대로 트럼프가 선택한 것이 북한이다. 과거의 닉슨처럼 트럼프는 적국 지도자 김정은을 만나 70년 동안 지속된 북-미 관계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한다. 도덕적으로 취약한 개인이 위기에 몰려 ‘세계사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아이러니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역사 속에서 빈번히 출현하는 이 아이러니를 ‘역사이성의 간계’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성은 야심과 약점을 동시에 지닌 개인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김정은의 만남은 트럼프가 처한 위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촉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삼성이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서 분석한 대로, 미국이 ‘거대한 전환’의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초국적 보수동맹으로 북한 봉쇄작전을 펴고 여기에 맞서 북한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완성 단계로까지 고도화했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미국 본토가 위협당하는 상황까지 오지 않았다면 트럼프 아이러니도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 핵 위기와 트럼프 위기가 공조해 역사를 전진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헤겔이 말한 대로 역사에 이성이 있다면, 20세기가 만든 냉전의 마지막 장벽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이 이성이 할 일이다. 그런 시야에서 보면 트럼프는 남북의 지도자와 함께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 개인이란 열정을 다 바쳐 세계사의 뜻을 대행하는 인간이다. 정치가이기 이전에 사업가인 트럼프가 진실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의도에 ‘트럼프 월드’가 서 있듯이 적성국가의 심장부에 ‘트럼프 타워’를 세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트럼프 타워가 대동강변에 들어선다면, 북한으로서는 그토록 열망했던 체제보장의 가장 확실한 보증을 얻는 것이 아닐까. 트럼프가 트럼프 타워를 공격하는 자해행위를 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아이러니의 철로를 타고 온 역사의 기관차는 분단을 넘어 평화와 번영의 기착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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