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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31 18:03 수정 : 2018.05.31 20:31

김영희
논설위원

얼마 전 들어보니,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의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지난 19일 혜화역 일대 시위에 경찰은 패닉이었던 모양이다. “예상인원 500명, 이랬는데 1만명을 넘어가니… 강남역 시위랑 그쪽은 또 완전 다르다면서요? 도대체 주류가 어딘지.” 주최단체의 정체를 파악해 시위에 대비하는 데 익숙한 경찰로선 당황할 일이다. 바야흐로 온라인과 에스엔에스(SNS) 여기저기서 위성처럼 뭉친 익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지는 시대다. 모였다가 흩어진다. 모두가 배후이자 아무도 배후가 아니다. 2년 전 이화여대 학생들의 미래라이프대학 반대시위와도 어딘가 닮은 듯한 이 현상의 중심엔 20대 여성들이 있다.

지난 26일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동일범죄 동일수사 동일인권’ 요구하며 여성들이 연 시위.
지난 26일 청계천 한빛광장에선 혜화역 때와는 또다른 온라인카페가 주최한 ‘동일범죄·동일수사·동일인권 요구’ 시위가 열렸다. “가해자가 남성이면 미래봐서 감형하고 가해자가 여성이면 천하제일 악질인가.” “불법촬영 몰카게시 성별없이 잡는다고? 포털에만 검색해도 여성몰카 널려있다.” 3시간 넘게 구호를 외치고 함께 연설문을 읽던 800여 젊은 여성들은 20분씩 피켓을 높이 든 채 2차례 침묵시위를 벌였다. 사회자는 쉬어도 된다 했지만 그런 이들은 거의 없었다. 초여름 같은 땡볕 아래 지칠 때마다 다시 팔을 치켜드는 그들에게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지금의 20대들은 여아 낙태가 극심하던 90년대 태어났다. 정점을 찍은 94년, 출생 성비는 115.2였고 셋째의 경우 무려 190.6이었다. ‘힘겹게’ 태어났지만 성장 시기엔 적어도 노골적인 차별은 사라졌다. 2007년엔 알파걸 신드롬까지 불었다. 그런 이들에게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불법촬영 문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선택한 네오가 현실을 인식하던 그 순간의 충격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여권은 신장됐다는데 개인의 삶조차 보호 못 받는 ‘후진’ 현실이라는 자각. 특히 젊은 여성들에겐 생명과 실존이 걸린 문제다.

이들은 철저하게 익명에 머물고자 했다. 자유발언은커녕 개별 피켓도 친목 도모도 금지했다. 언론의 근접촬영은 물론 개별인터뷰도 불허됐다. 피켓을 제외하면 혜화역 시위와 비슷한 지침이다. 주최 쪽 한명을 붙잡고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면 요구가 흩어지니까요. 여기엔 우리가 만든 연설문과 구호·방식에 동의한 분들이 온 거고, 또다른 방식을 원하면 다른 곳에 모이겠죠. 저희는 호소하지 않아요.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거죠.” 나 같은 기성세대는 성차별적 구조를 바꾸려면 설득과 대화, 현실적 타협안의 제시부터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은 ‘호소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이라 잘라말했다. 한 여성학자는 “청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개인 삶의 침해에 훨씬 민감하다. 젊은 여성들은 청년들의 경제적 불안감에 성적 침해 불안감까지 떠안고 있다. 정치·사법·언론은 물론 대의가 앞서거나 제도권과 타협하던 기존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다”고 짚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을 선글라스와 마스크, 익명에 가둬놓은 게 우리 사회라는 점이다. 여성시위 때마다 테러 예고가 나오고, 남초 커뮤니티에선 현장 사진 ‘얼평’(얼굴평가)이 돌고, 요구에 귀 기울이기보다 ‘(운동권)이냐 웜(워마드)이냐’ 같은 규정부터 앞세워 논란이 되는 사회에서 그것은 최소한의 자기보호장치다. 오는 9일엔 2차 혜화역 시위가 열린다. 23살 여대생은 “현실이 정말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내 삶도 버겁고 체계적으로 뭘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피켓은 들 수 있으니 그거라도 하겠다는 또래들이 많다”고 말했다.

저녁 8시, 검은 옷의 여성들이 군중 속으로 흩어졌다. “생존이 달렸다고 느끼기에 이들은 계속 분화하며 더 끈질기게 액션을 이어갈 것”이라는 그 여성학자의 말이 맴돌았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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