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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11 17:33 수정 : 2018.09.12 14:04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칠순 잔칫상이 참 초라하다. 13일은 가인 김병로 선생의 초대 대법원장 취임을 기리는, 대한민국 사법부 창설 70돌 기념일이다. 법원은 기념식과 학술대회 등을 준비 중이지만 잔칫집 분위기는 이미 아니다. 기념일을 앞두고 대법원 청사의 법원행정처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법원이 사법농단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거듭 기각하는 동안 실제로 증거 문서가 파쇄되고 컴퓨터가 분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법원은 이제 증거인멸의 방조범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게 됐다. 뻔한 허물을 덮겠다고 폭주한 결과다. 그사이 문짝은 부서지고, 서까래는 무너지고, 들보는 기울었다. 어떻게 법원이 이렇게까지 허물어졌을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실력 있는 법관’들이 있다. 그 또래에선 우수하다는 법원행정처 판사들은, 칭찬을 기대하는 우등생처럼 별 죄의식 없이 불법과 위헌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17기의 미래 대법관 누구와 선두 누구, 18기의 선두권 누구와 또 누구 등이 이를 보고받고, 혹은 주도했다. 다들 ‘해오던 일’이고 자신은 ‘딱 이 정도만 했다’고 말한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유 불문하고 달려가는 행정처의 모습은 사법농단 사태 이후 들어선 새 진용도 마찬가지다. ‘김명수 대법원’은 “재판거래는 없었다”는 아무도 안 믿는 해명을 여전히 고집한다. 일선에선 온갖 기괴한 이유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해 수사를 가로막고, 행정처는 초점이 맞지 않게 된 엉뚱한 해명과 입장을 내놓는다. 엉성한 방어선이 곳곳에서 뚫리는데도 마냥 ‘모르쇠’다. 대학·사법시험·연수원을 거치는 ‘시험사회’의 0.01% 최우등생이라는 판사들의 모습이 이렇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재판거래’ 의혹도 경쟁과 승진의 좁은 사다리를 거친 ‘실력 있는 법관’들이 한 일 때문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유죄를 뒤집은 대법원 판결,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지연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이해에 맞춰 판결 주문을 바꾸거나 절차를 뒤집고 법리를 뒤트는 데 동원된 게 ‘실력’이라면, 그런 ‘실력’은 더는 법관 사회의 가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허물어진 법원을 다시 세우자면 시늉으론 안 된다. 지금까지의 법원을 온존하자는 게 재건일 순 없다. 법원행정처를 이사 보내자는 정도가 고작인 김명수 대법원의 자체 개혁안은 그래서 한심하다.

법원이 유례 없는 위기 속에 창설 70돌을 맞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사진은 지난 6월15일 김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나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부서진 문짝부터 바꾸는 게 먼저다. 사법농단·재판거래에 연루된 법관, 잘못된 관행을 다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너진 서까래를 엉성한 가림막으로 덮으려는 시도도 허망하다. 법원이 지금처럼 진상규명의 걸림돌이 되면, 머지않아 이 모든 일에서 법원이 배제될 수 있다. 이제는 사법농단 특별법 제정과 특별재판부 구성을 넘어, 법원에 대한 국민의 직접 통제까지 거론되는 마당이다. 법원으로선 지금이라도 김명수 대법원장의 석달 전 다짐대로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서는 게 그나마 최선이다.

한계가 드러난 엘리트 중심 관료사법 체제의 대수선도 미룰 수 없다. 법원은 이제 통제와 경쟁 대신 독립적 재판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재판도 변호사와 시민이 더 많이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경력법관제와 법관인사 이원화 및 인사 최소화로 변화의 조건은 갖춰진다. 민사 증거개시, 참심제, 형사배심제 전면화 등으로 ‘시민 참여’도 더욱 활성화할 수 있다.

70돌 기념식에선 ‘김명수 대법원’의 해결책이 분명하게 제시됐으면 좋겠다. 우왕좌왕하는 우유부단한 대법원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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