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17 17:12
수정 : 2019.01.17 19:22
김영희
논설위원
2003년 2월 민주노총 사무실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철제의자를 내준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허리가 안 좋았던 그는 딱딱한 의자를 농담조로 불평했는데, 그해 6월 화물연대 2차 파업을 기점으로 임기 내내 충돌한 노정관계와 함께 언급되는 일화가 됐다.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참여정부 시즌 2’는 안 될 거라 확신했다. 유연화 패러다임이 전세계를 휩쓸던 15년 전엔 정부도 그 자장 안에 있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엔 ‘불평등’이 화두다. 그런데 요즘은 흔들린다.” 얼마 전 만난 한 노동문제 전문가의 전망은 어두웠다. “환경은 달라졌는데 정책담당자들 사고가 그대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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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방문해 문성현 위원장(오른쪽)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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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동 이슈를 기획재정부가 이끄는 모양새는 사실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녹실회의’에서 최저임금 기준이 월 174시간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말이 나온 지난달 23일, 노동계는 비상이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일요일에 체계적 대응도 안 되고 닥치는 대로 전화해 항의밖에 못 했다”고 했다. 약정휴일 제외로 마무리됐지만, 30년 된 제도를 정부 주도로 바꾸는 시도는 이번엔 ‘결정구조 개편’으로 이어졌다. 1년 전 최저임금위원회 전문가 티에프 당시 모든 쟁점이 연동돼 있다며 합의가 무산된 사안이다. 그런데 노동계는커녕 최임위 위원들에게도 한마디 귀띔 없이 전격 발표했다.
정부의 노동정책이 ‘속도조절’을 넘어 ‘방향전환’이란 판단엔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해 쌍용차나 케이티엑스 승무원 해고자 복직, 힘겹지만 진행중인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전환은 하나하나 쉽잖은 일이었다. 최저임금, 주 52시간 보완책은 불가피하다. 다만 정부의 선제적 계획이 아니라 재계와 보수에 밀려 하나씩 내놓으며 속도전으로 가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를 주장해온 이들도 “가이드라인을 주고 빨리 결정하라는 식이 이어지니 정말 정부가 사회적 대화에 절실한가, 전략이 있나 싶다”고 말한다. 경사노위 일부 공익위원들은 ‘심각한 상황까지 고민중’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참여정부) 노정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에 비하면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길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이 첫 단추’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참여정부 경험이 말하듯, 개혁은 내용만큼 주체도 중요하다.
민주노총 내 좌파 단체들은 정부의 태도를 빌미 삼고 있다. 13일 열린 ‘경사노위 참가 말고 투쟁 건설로’ 토론회 참석자들은 “정부의 노동 개악이 분명해졌다”며 “참여 반대를 대중투쟁 건설의 계기로 삼자”고 입을 모았다. 경사노위 참여 여부를 논의할 28일 대의원대회를 물리력으로 저지하자든지 ‘김명환 위원장 퇴진’을 내걸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반대는 할 수 있다. 문제는 전제다. 이들은 “사회적 대화는 권리가 동등할 때 의미가 있다”는데, 자신들의 대중투쟁으로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 설 것이란 믿음은 ‘정신승리’에 가까워 보인다.
민주노총이 빠진다고 경사노위가 문 닫을 것도, 국민 비난은 받겠지만 민주노총이 사라질 것도 아니다. 걱정은 민주노총이 빠진 사회적 대화에서 경제상황이 악화될수록 불리한 건 노조도 없는 힘없는 노동자 쪽이기 십상이란 점이다. 1년 전 최임위 노동자위원들도 거의 합의한 산입범위 개편안이 막판에 무산돼 국회로 넘어가, 저임금 노동자에게 직결되는 복리후생비까지 포함된 건 대표 사례다. 사회적 대화야말로 고도의 ‘투쟁’ 아닐까. “좋든 싫든 주전장은 거기다. 이번에 무산되면 사회적 대화 틀을 없애고 정부 주도로 가자는 식의 관료들 사고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고 김유선 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말했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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