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02 17:28
수정 : 2019.07.0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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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이 2일 오전 국무회의 참석에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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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하기는 어렵지만 남 못되게는 쉽게 할 수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교수 시절이던 2012년 안식년을 틈타 지은 책 <종횡무진 한국경제>에서 그린 한국 사회는 ‘거부권만 넘치는’ 곳이다.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헤게모니를 갖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언제든지 좌절시킬 수 있는” 이른바 ‘비토(거부권)크라시’ 체제다.
그 뒤 7년 동안 ‘촛불’에 힘입어 대통령이 바뀌고, 국회 권력의 판도가 뒤집히고,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에 더해 남북미 정상 3자 회동까지 이뤄지고, 김 교수 자신은 재야의 비판자에서 청와대 사회·경제 정책 총괄역으로 발탁되는 격변을 거쳤음에도 거부권 사회라는 양상은 불변이다. 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다. 정부도, 재벌도, 언론도, 관료 조직도, 어떤 정당도, 시민단체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지만 남 하는 일은 얼마든지 훼방 놓을 수는 있는, 그러면서 모두가 손해 보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장탄식은 생생한 현실감으로 와닿는다.
84일 만에야 겨우, 그나마도 불완전하게 정상화된 국회의 무기력증은 거부권 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상의 극명한 예다. 한 정당의 거부권 행사만으로 국회가 마비되는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지난 4월25일 제출된 추가경정예산안이 언제 처리될지도 여전히 가물가물하다. 2일 현재 국회 계류 기간이 68일에 이르러 박근혜 정부 때의 최장 기록(38일)을 훌쩍 넘어서 있다. 미국 정치 또한 진작에 ‘비토크라시’로 규정됐다(프랜시스 후쿠야마, 2013년 언론 기고문) 하니,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며 위안거리로 삼아야 할까.
지난달 21일 정책실장 임명 뒤 김 실장의 언행은 7년 전의 ‘거부권 사회’ 진단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정책실에 내린 첫 지시사항으로 ‘이해관계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자 했다”고 소개한 뒤, 곧이어 각 정당 원내대표들을 찾아가 만난 게 심상한 일정 소화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토크라시 체제의 주요 축과 접촉해 거부권 행사 대신 신뢰와 협조의 양상으로 끌어보자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임명 직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정책 이해관계자와 소통, 협의에 충실하겠다”고 말한 것, 앞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합참의장’으로 치켜세우고 자신의 역할을 ‘병참기지 참모장’으로 낮춰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힐 만했다.
거부권 사회를 초래하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교과서적 해법의 첫번째는 활발한 ‘소통’을 통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걸 막고 협력하는 쪽으로 돌려세우는 일이다. 김 실장의 행보와 겹쳐 보인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교과서적인 것은 지극히 옳은 당위이나 교과서 밖 현실에선 무력한 수가 많다. 김 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쪽의 정치력 발휘에 따른 딜레마 탈출 성과가 제한적일 것임을 자유한국당의 행보와 국회의 모습에서 엿본다.
거부권 사회 탈출의 두번째 해법은 기회주의적 행동에 강력한 ‘벌칙’을 부과하는 일이다. 당근에 가까운 첫번째 것과 달리 채찍성이다. 시일이 걸릴지라도 ‘법대로’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법치주의 방안이다.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국회 선진화법 위반, 회계조작(분식회계) 같은 경제·사회적 반칙 행위를 법대로 처리하는 데 따른 파장과 효과의 울림은 작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여전히 불신의 대상인 사법 영역의 몫이란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긴 하지만.
두 해법 모두 돌고 돌아 결국엔 유권자(국민)의 관심과 참여와 기억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정치와 사법 영역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기회주의적 행동에 대해 정치적 또는 사법적·경제적 파산에 이를 수 있다는 여론의 형성과 경고와 행동(투표 등)으로 이어진다면 두 해법이 교과서 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적어도 제로(0)는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김 실장이 임명 직후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을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으로 바꿨음을 알리면서 “여기서 ‘you’(당신)는 국민이고, 저는 국민의 격려와 지원 위에서만 간신히 일어설 수 있는 미약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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