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20 16:03
수정 : 2019.08.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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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0월14일 도쿄 인근 아사카의 육상자위대 훈련장에서 육상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아사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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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세계 문명권을 여덟개로 나눠 고찰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을 동아시아 문명과 구별해 독자적인 문명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문명이 복수의 국가를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은 문명의 단위와 국가의 단위가 일치하는 유일한 문명이라고 헌팅턴은 말한다. “문화와 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은 고립된 나라다.” 헌팅턴의 진단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유교·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동시에 신도라는 고유의 종교체계 아래서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문화적으로 고립된 세계 안에 머물렀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사정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한편으로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도를 국가 종교로 승격시켜 그 정점에 ‘천황’을 둠으로써 과거의 유산을 오히려 강화했다. 이 천황숭배 종교를 앞세워 일본은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헌팅턴이 진단한 일본의 문화적 특성은 21세기에 들어와 다시 강화되고 있다. 평화헌법을 들고 세계를 향해 팔을 벌리던 일본이 집단적 망상에 사로잡힌 듯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퇴행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 역행의 선두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있다. 아베의 본심은 지난 8·15 패전 기념식에서 또 한번 드러났다. 아베는 2012년 2차 집권 이후 7년째 한번도 침략과 전쟁의 가해자로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국민의 ‘희생’만 기렸다. 반성과 사죄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에이급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과거와 다를 바 없이 공물을 바쳤다. 아베의 뒤를 따르는 극우 정치인 50명이 야스쿠니를 찾아 과거의 영광을 향해 참배했다. 자기 행위가 낳은 과오를 인정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는 것이 성숙의 징표라고 한다면, 일본 정치야말로 성숙의 문턱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미성년 상태에 머물러 있다.
아베는 2006년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자를 펴내 정치적 청사진을 밝힌 바 있다. 집권 이후 평화헌법을 바꿔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을 보면, 아베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관념 속에는 러일전쟁 직후나 만주사변 직후처럼 대륙 침략과 세계 제패를 향해 욱일승천하던 그 시절의 일본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베가 ‘아름다운 나라’를 향해 나아갈수록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로부터 멀어진다.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를 향해 나아갈수록 정상성에서 이탈해 고립 속에 빠져든다. 이것이 아베 폭주의 역설이다. 아베는 자신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려고 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베가 자기식의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투쟁하면 투쟁할수록 일본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밀려나고 있다. 정직하지도 못하고 자기성찰도 없으며 민주적이지도 않은 나라가 인류 보편의 공통감각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는 없다.
아베의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앞세워 미국과 손잡고 인도를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군사적 야심을 품는다고 해서 아베의 일본이 국제사회의 존경받는 나라로 올라설 수 있는 건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낳은 정신 구조를 해체하고 재편하지 않는 한, 환상 속에서 인도·태평양을 질주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왜소화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아베 폭주의 끝에는 헌팅턴의 진단이 암시하는 대로 ‘히키코모리 국가’ 일본, ‘외톨이 국가’ 일본이 있을 뿐이다. 아베의 퇴행을 저지하지 않으면 일본은 참다운 정상국가가 될 수 없고 세계 보편의 도덕적 일원이 될 수도 없다. 아베 폭주는 한국에는 경제적 위협이지만 일본 국민에게는 훨씬 더 근본적인 위협이다. 일본 국민이 깨어나지 않으면 일본은 아베의 망상과 함께 영원한 미성년의 고립 상태에 갇힐 수밖에 없다. 한국 국민의 아베 반대 투쟁이 지닌 초국가적 의의가 여기에 있다. 일제 불매운동을 고리로 삼은 한국의 반아베 투쟁이 일본 국민의 각성을 촉진하고 한·일 시민사회의 공동투쟁으로 상승한다면, 그 투쟁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평화질서를 창출하는 원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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