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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5 19:09 수정 : 2019.09.25 17:42

안재승

논설위원

‘D의 공포 엄습’ ‘닥쳐오는 D의 공포’ ‘퍼지는 D의 공포’ ‘커지는 디플레이션 공포’ ‘문앞에 다가온 디플레’ 등등. 통계청이 지난 3일 발표한 ‘8월 소비자물가’가 -0.04%로 나오자 거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런 제목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디플레이션은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광범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특정 품목을 중심으로 가격이 일시적으로 내려가는 물가 하락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디플레이션을 마이너스 물가가 2년 정도 계속돼 경기가 침체되는 상태로 정의한다. 마이너스 물가는 1965년 물가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언론들은 성장 저하에 따른 총수요 부진을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우리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픽 / 김지야
과연 그럴까? 물가는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지난해 이후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소비도 위축됐기 때문에 총수요 감소가 물가 하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만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계량적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관련 통계로 추정해보면 소비가 디플레이션을 초래할 정도까지는 감소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통계청의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지난해 소비는 전년 대비 4.3% 늘어 2011년(4.6%) 이후 7년 만에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올해도 7월에는 0.3% 감소했지만, 1분기와 2분기엔 각각 1.7%와 2.0% 증가했다. 수요 부진을 마이너스 물가의 주된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 공급 측면에선 물가 하락 요인이 뚜렷하다. 소비자물가 조사 대상 품목 460개 중 8월에 276개가 오른 반면 151개가 내렸다. 나머지 33개는 변동이 없었다. 상승 품목이 2배 가까이 많은데도 물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농산물과 석유류의 가격 하락 폭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농산물은 지난해 8월 기상 이변으로 9.3% 올랐는데 올해는 양호한 기상 여건에 힘입어 생산량이 늘어나 11.4% 내렸다. 지난해 8월 12.0% 올랐던 석유류도 국제유가 하락과 정부의 유류세 인하 덕분에 6.6% 내렸다. 이처럼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하면 근원물가는 0.9% 상승했다. 통계청은 지난해 농산물과 석유류 가격이 높았던 비교 시점에 따른 ‘기저 효과’ 때문에 연말까지는 물가 상승률이 0% 안팎에 머물 것으로 예상한다.

무상교육·급식·교복과 건강보험 확대 등 정부의 복지정책도 물가 상승률을 낮추고 있다. 8월에도 교복(-46.2%) 급식비(-40.9%) 교과서(-10.1%) 고교 납임금(-3.2%) 병원 검사비(-7.3%) 치과 진료비(-1.1%) 등이 내렸다. 올해 2학기 고3부터 시작된 고교 무상교육의 영향이 반영되면 물가 하락 효과는 더 커진다. 복지정책이 물가에서도 국민 삶의 질을 높이고 있는 셈이다.

기술 발전과 인구구조 변화 같은 구조적 요인도 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온라인 거래 확산이 대표적이다. 통계청의 ‘온라인쇼핑 동향’을 보면, 지난해 온라인쇼핑 거래액이 111조9천억원(전년 대비 22.6% 증가)으로 100조원을 돌파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17.8% 늘었다. 온라인 거래는 유통 비용을 줄일 뿐 아니라 가격 경쟁을 촉발시켜 상품 가격을 낮춘다. 이른바 ‘아마존 효과’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발표한 ‘온라인 거래 확대의 파급 효과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전체 상품 거래 중 온라인 거래 비중이 1%포인트 높아지면 물가를 0.08~0.10%포인트 낮추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소매판매액 중 온라인쇼핑 비중이 지난해 7월 18.9%에서 1년 새 21.4%로 커졌다. 통계청도 이를 반영해 물가 조사에서 온라인거래 비중을 계속 확대해나가고 있다. 이런 구조적 요인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인데, 특히 우리나라의 진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반면 인건비·자재비·임대료 등의 상승으로 외식비가 1.7% 올랐고 택시요금도 15.6% 오르는 등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물가가 올랐다. 소비자들이 ‘마이너스 물가’를 체감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종합적으로 보면 농산물·석유류와 복지정책 등의 물가 하락 기여도 0.94%포인트가 서비스 부문 등의 물가 상승 기여도 0.92%포인트를 상쇄하면서 마이너스 물가가 나온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경제 현상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과가 나타난다. 어느 한면만 부각해서 보면 중대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마이너스 물가가 별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경제의 하강 속도가 빠른데다 일본의 경제보복과 미-중 무역분쟁 등 대외 악재들이 중첩돼 있어 총수요 부진이 악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에 면밀한 점검과 선제적 대응을 주문하는 것과 공포감을 지나치게 조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과도한 비관론은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위축시켜 ‘자기실현적 위기’를 부를 수 있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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