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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10 18:25 수정 : 2019.09.10 19:12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21일 오전 중국 베이징 구베이수이전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를 마친 뒤 한-일 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2019.8.21 베이징/연합뉴스

미국이 195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일본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1951년 8월 당시 국무부 차관보 딘 러스크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독도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 아래 있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6·25 전쟁의 와중에도 결연히 독도 수호에 나서고 이후 독도 영유권 문제가 한-일 갈등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하자, 미국은 뒤늦게 이 문제가 한-일 관계는 물론이고 한-미 관계도 위협할 뇌관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중립으로 선회했다.

지난달 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당시 독도 문제를 떠올렸다. 한국 정부가 협정 종료 결정을 발표하자 미국은 “강한 우려”와 “실망감”이란 표현을 동원하며 힐난했다. 반면에 애초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해선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아, 사실상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비난에도 물러서는 기색 없이 “아무리 동맹관계라도 국익에 우선할 순 없다”며 정면으로 맞서자, 미국은 뒤늦게 한·일 양쪽의 책임을 함께 거론하며 얼추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선회했다.

아베 정부는 이번 논란 과정에서 내내 협정의 지속을 바란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지만, 속내도 정말 그런지는 의심스럽다. 일본이 진정으로 한-일 간 군사정보 교류를 원했다면, ‘수출규제 문제를 협상으로 풀자’는 한국의 제안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는 지속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춰 왔다. 일본의 ‘외교청서’에서 한국은 몇 년 전만 해도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이었으나 이제 한-일 관계는 “엄중한 상황에 직면”했고, ‘방위백서’에선 한국의 우선순위가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인도, 아세안에 이어 4번째로 격하했다. 또 아베 총리의 외교 브레인으로 꼽히는 호소야 유이치 게이오대 교수는 얼마 전 언론 기고에서 “일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이고 한국의 중요도는 크지 않다”며 사실상 한국을 무시해도 될 나라로 취급했다.

일본이 이처럼 전략적으로 별 가치도 없는 나라와의 안보협력을 그렇게 중시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게다가 일본은 수출규제 이유로 안보상의 우려를 들지 않았던가. 혹 일본이 “협정 유지를 원한다”고 되뇐 건, 파탄의 책임을 한국에 떠넘기려는 명분 쌓기가 아니었을까. 한-일 정보협정의 실제 종료는 종료 통보 90일 뒤 발효된다. 아직 두 달 넘게 남아 있다. 일본에 정말 협정이 중요한 것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번 정부의 과감한 협정 종료 결정은 ‘양날의 칼’이었던 것 같다. 이번 결정이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면, 그건 나름 묘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미국은 일본의 경제보복을 한·일 양자 간의 문제로 보고 한발 떨어져 있던 태도를 버리고 즉각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국이 이제 한-일 관계에 직접 개입할 것이라고 속단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한-일 관계가 더 악화하는 걸 막는 구실은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미 간 불협화음을 노정한 것은 또 다른 변수다. 사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한다”는 태도로 맞선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출범 이후 사드 배치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대북정책도 북-미 관계에 종속시키다시피 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에서 줄곧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온 것과는 크게 구별되는 것이어서, 의외였다. 이제 앞으로 한-미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정부가 짊어져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일부에선 한-미 동맹이 위기라는 주장도 하지만, 그렇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동맹 위기론은 때 되면 나오곤 했지만 돌아보면 늘 철 지난 레퍼토리였을 뿐이다.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스스로 비하할 필요는 없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미국이나 중국이나 중요한 전략 거점일 수밖에 없다. 동맹이라는 이유로 이견이 있더라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박병수
논설위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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