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4 17:49
수정 : 2019.10.25 02:36
김영배
논설위원
이낙연 총리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24일 회담 결과를 놓고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양국 현안을 조기에 해결하도록 노력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에 일본 쪽이 화답해 ‘경색 국면을 타개하고 소통을 촉진하자’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니 그럴 만하겠다. 지난 7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처 뒤 막연한 불안감에 빠져 있던 국내 기업들에는 희소식이다. 규제가 금방 풀리지는 않더라도 수면 위의 제도와 달리 수면 아래의 실제 운영은 유연해질 수 있다. 수출규제로 일본 기업들의 갑갑함 또한 심하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띤 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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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총리가 24일 오전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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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강경 일변도였던 아베 총리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은 10월 들어서였다.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4일, 국회 연설)라거나 “(한-일 간) 늘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16일, 참의원 예산위원회)는 유화적 발언을 잇따라 냈다. 수출규제 뒤의 흐름과 무관치 않은 태도 변화였을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100일(11일) 즈음해 나온 여러 분석에서 드러났듯 규제에 따른 피해는 일본에 더 많이 돌아갔다. 한국 쪽이 본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했음은 일본 쪽 자료로도 확인된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올해 8월 펴낸 <불황탈출>에서 한-일 경제전쟁을 두고 배경이나 추이 면에서 2010년의 중-일 희토류 분쟁과 닮은꼴이라고 짚었는데, 경과로 보아 그 결말까지도 같아질 것이란 예상을 하게 된다.
희토류 분쟁에선 일본이 공격을 받는 쪽이었다. 분쟁 직전인 2009년 일본은 희토류의 86%를 중국에 기대고 있었다. 수출규제 3대 품목 중 두 가지의 일본 의존도가 90%를 넘는 한국의 처지와 비슷했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길을 갑자기 막고 나서자 일본이 발칵 뒤집힌 건 당연했다. 결과는? 일본 쪽의 완승이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희토류 대체 공급처 확보, 대체 재료 발굴, 희토류 사용량 저감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희토류의 중국 의존도가 2015년 55%까지 떨어졌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란 판정까지 받은 중국은 2015년 1월 희토류 수출규제를 접는다.
중-일 희토류 분쟁이 5년 가까이 끌었던 것에 비춰 그동안의 경과만으로 한국의 완승을 예단하기에는 이르다 할 수도 있다. 일본의 공세를 극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기업들이 겪을 곤란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점도 있다. 당장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 해도 소재와 부품 공급이 불확실한 데서 비롯되는 막연한 불안이 기업 운영에는 커다란 짐이다. 무역전쟁의 속성상 이긴다 해도 손해를 덜 본다는 뜻이지 손해를 안 보는 것은 아니다. ‘전쟁 모드’를 ‘외교 모드’로 바꾸어 양쪽 다 실익을 챙기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 의존도가 높은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분위기는 기업 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달 중순에 만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의 회장은 “한-일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어도 한 군데로 쏠려 있는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수출규제라는 ‘어이없는 조처’ 말고 지진이나 해일, 태풍 같은 자연재해로 소재와 부품을 공급받지 못해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란 경고다. “일본의 대기업은 국내에서도 공장을 한 군데 두지 않고 두세 군데 분산해둔다. 한 나라 안에서도 이러는데 국가 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낙연 총리와 아베 총리의 만남을 사흘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운으로 “소리 없이 치고 나온 일본, 부질없는 일, 장기전의 승자는 한국”이라고 삼행시를 읊었다. 지금껏 거쳐온 경로에 비춰 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소·부·장을 키우는 과정에서 대-중소 기업 간 건강한 관계 맺음을 비롯해 산업구조와 경제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그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일본의 희토류 대체재 개발에 크게 이바지한 ‘원소 전략 프로젝트’는 자민당 정권 때 시작하고, ‘희토류 종합대책’은 민주당 정권에서 세웠으며, 이 대책을 긍정한 평가서는 2015년 자민당 정권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장기전의 승리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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