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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6 17:27 수정 : 2019.11.27 17:47

이달 초, 위독한 동거인 계좌에서 13억원을 인출한 여성이 ‘횡령’ 혐의로 집행유예 유죄를 받았다. 달러상 등을 하며 번 돈을 절세를 위해 동거인 명의로 했었다는 피고인 주장의 진위는 모른다. 다만 그 80대 여성이 60년간 함께 부를 일궜고 상속인들에게 피해액을 변제했음을 법원도 인정했다는 대목엔 눈길이 오래 갔다. 60년을 살았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그는 ‘가족’이 아니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죽음을 앞둔 동백이 엄마는 생명보험증서를 들고 27년 만에 딸을 찾는다. 그런 그에게 ‘법적’ 딸이 나타나 버렸던 딸을 위해 청소일을 하며 20년간 꼬박 부었던 보험을 “법대로’’ 내놓으라고 한다. ‘식모’ 대접에 ‘꽃뱀’ 취급만 받았어도, 혼인신고를 한 그는 ‘가족’이다.

결혼에 의한 가족만이 ‘정상가족’이란 이데올로기와 구조는 모질고 질기다. 동백이 엄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룸살롱이나 직업여성들의 허드렛일 정도였다. <이상한 정상가족>(김희경)은 “1980년대 입양이 산업화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됐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되고 평범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됐다”고 했다. 지금은 좀 다를까. 가상마을 옹산에서 술집 ‘까멜리아’를 하는 동백이는 8살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다. 2018년 기준 18살 이하 자녀를 키우는 미혼모는 2만1254명, 미혼부는 7768명으로 여성이 압도적이다. 국가 지원이 예전에 비할 수 없이 늘긴 했다. 저소득 한부모 가족 지원뿐 아니라 청소년 임신·출산, 자녀양육·돌봄 지원에 검정고시 학습비도 생겼다. 하지만 틈새는 크다. 예를 들어 18살 이하에게 요구하는 임신확인서는 검사비용도 부담이지만 보호자가 없는 경우가 많아 정보접근조차 어렵다. 열악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미혼모 가정 300명 중 19%가 임신 25주까지, 3.7%는 출산 때까지 병원 한번 가지 않았다는 조사결과(김지현 육아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 2019)는 참담하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미혼모는 아이 포기가 현실적인 선택이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입양은 경제력과 상관없이 의료비·아이 심리치료비도 받는데, 미혼모는 원가족 소득도 따진다. 친부모 등 원가족과 관계 회복이 더욱 절실한 이들인데 단절을 입증해야 지원을 받을수 있는 셈”이라며 “입양은 훌륭하고 미혼모는 비도덕적이란 인식이 깔린 것”이라고 말한다. 몇달 이상 걸리는 신청 절차 앞에선 보호시설의 직원조차 두 손 들 정도다. 호적제가 폐지됐지만 가족관계법 역시 가부장제 원리가 지배한다. 요즘 ‘미혼모’ 대신 ‘비혼모’란 말이 꽤 쓰이지만 차별과 낙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미혼부의 어려움을 전하는 기사엔 대체로 따뜻한 반응이, 미혼모에겐 문란하다는 댓글이 압도적인 현실은 여성혐오와도 무관하지 않다.

지난주 ‘미혼모’를 주제로 한국여자의사회, 한국여성변호사회 등 전문직 여성 단체들이 모였다. 여성 의사들은 10대 미혼모들을 만나 의료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한국여자의사회 김찬주 사업이사(의정부성모병원)는 “엄마가 건강할 때 아이도 건강하다. 미혼모들에겐 산부인과·내과뿐 아니라 정신과 지원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복잡한 출생신고제 대신 병원에서 보편적 출생등록을 하자거나 미혼모에게 원가족의 소득 제한 없이 지원하자는 등 ‘아동’을 중심으로 지원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국회 안팎에서도 커지고 있다.

몇년 전 갔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0대 임신부가 요청하면 무료진단과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버스라인’(Birthline)의 24시간 운영과 공공병원 연계 시스템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과거 ‘강제입양’ 정책이 아이와 엄마에게 남긴 고통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입양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저출산 대책에 100조원 넘게 썼다는 초저출산국에서 중복출생신고를 걸러내기 힘들다고, 행정지원에 돈이 든다고, 미혼모·부의 아이 양육을 어렵게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다. 한국은 오이시디 회원국 중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다.

사회의 인식 변화 없이 국가정책의 전환은 쉽지않을 터. 옹산의 평범한 사람들 ‘옹벤저스’가 동백의 삶에 이룬 따뜻한 기적은 분명 판타지였다. 그래도 전문직 여성들의 작은 움직임처럼 “착한 놈이 끝없이 백업되는” 세상을 이루는 건 그 누군가가 아닌 우리라 믿는다. ‘온전하지 않은 가정’은 없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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