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4 17:46
수정 : 2020.01.15 14:13
김영희
논설위원
“이건 기적이다. 그게 되겠어, 안 될거야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다.”
지난 9일 국회에서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은 특정 성으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한 법안이 통과된 뒤, 밤낮없이 법안을 위해 뛰어온 세계여성이사협회의 한 회원은 말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165조의20 신설에 따라, 남성 일색인 평균 7~8명의 대기업 이사회엔 적어도 여성 1명이 들어가게 된다. 민간 영역에 젠더 할당이 의무화된 첫 사례이니 ‘기적’이 과장된 표현도 아니다. 여성할당제에 관해 몇차례 글을 썼지만 고백하자면 내심 ‘한국에서 이게 될까’ 생각할 때가 많았다. 가부장적 문화도 그렇거니와 몇년 새 더해진 여혐 현상과 20대 남성 분노론은 ‘넘사벽’ 같았다. 어떻게 ‘기적’은 가능했나.
시작은 2018년 1월 여성 등기이사 모임인 이 단체의 밤샘토론이었다. 위를 올려보면 아무도 없는 남성 중심 일터에서 평생을 달려온 40~60대 여성들로선 ‘후배들에겐 다른 길이 열려야 한다’만큼 절실한 바람은 없었다. ‘여성의 경영진출 확대’를 미션으로, 여성 이사 할당제와 우먼펀드 출시를 주요 사업으로 정했다. 이들 목소리에 1998년 기업지배구조 개선위 자문위원장으로 사외이사제 도입을 주도한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귀 기울였다. 그해 8월 ‘이사회 3분의 1 이상을 여성으로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다음은 롤러코스터였다. 정무위에서 ‘현실성’을 이유로 3분의 1이 최소 1명으로, ‘기업 부담’을 이유로 의무공시는 다시 자율공시로 바뀌었다. 문턱이 닳도록 다니며 설명했지만 막판 법제사법위에선 “민간기업에 대한 압력이자 남성 역차별”이라는 자유한국당 한 의원의 집요한 반발에 ‘권고조항’이 돼 버렸다. ‘반전’은 본회의 직전 이뤄졌다. 이래선 법 취지가 사라진다며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년 유예를 두되 의무화하는 수정안을 낸 것이다. 수정안 투표를 호소한 최운열 의원은 “자연스레 여성 진출이 느는 분야도 있지만 기업은 일시적으로라도 강제하지 않으면 절대 안 바뀐다. 사외이사 때도 과잉 입법이란 반대가 거셌다. 총수의 무리한 결정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말할 수 있는 다양성 확보는 기업 경쟁력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현재 자산 2조원 이상 210여곳 여성 등기이사 비율은 3%(세계 40개국 3천곳 평균 20.6%)다. 이은형 국민대 교수(경영학)는 “일부에선 스튜어드십 코드를 두고도 ‘사회주의’ 운운하지만, 캐나다나 일본 연기금은 여성 이사가 없는 기업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여성 경영참여가 높은 기업에 투자 확대를 선언하는 시대다. 급증하는 여성 입사자들 ‘롤모델’이 절실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짚었다.
같은 날 국회에선 특정 성별이 국공립대 교원의 4분의 3을 넘지 않게 노력하도록 하는 교육공무원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2017년 서울대 다양성위원회와 국공립대여교수회연합회가 나선 이 법안 역시 우여곡절을 겪었다. 출신 학부처럼 성별 비율도 의무화하자던 발의안은 연도별 목표치를 갖는 권고조항이 됐고, ‘과잉 입법’ ‘평등권 침해’라는 자유한국당 두 의원의 반대에 법사위에서 2소위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국민의당 의원 시절 법안을 대표발의했던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최근 여성 임용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시뮬레이션해보니 여성 교원이 25%가 되려면 20년이 걸리더라”고 말했다. 국공립대 여성 교원 비율은 16.6%로 사립대(28.3%)보다도 크게 뒤처진다.
공정해 보이는 절차에 ‘숨겨진 편견’이 작동한다는 연구 사례는 무수하다. 좀체 여성 교원이 늘지 않던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선 여성 탈락자 이름을 남성 이름으로 바꿔보니 같은 지원인데도 점수가 올라갔다. 다양성위 위원장이었던 노정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어퍼머티브 액션은 특혜가 아니라 이런 편견이 있는 현실에서 불가피하고 한시적인 조처다. 5~6년 뒤엔 사라지는 조항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엘리트 여성’만을 위한 법안이라 할지 모르겠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난 ‘잘나가는 여성’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믿는다. 82년생 김지영이 힘을 얻은 건 선배 김 팀장의 모습이었다. 사실 기적이 아니었다. 절실한 여성 당사자들이 나서니 공감하는 남성 의원들이 움직였듯, 벽이 높아 보여도 사회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 ‘유리천장’ 법안에서 희망을 봤다.
dora@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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