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2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중국 충칭, 1941년 3월1일)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충칭 시기의 사진으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많지는 않지만,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관계자 개개인에 관련된 것들이다. 1941년에 김구와 김원봉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소앙과 신익희가 함께 나란히 보인다. 대단히 상징성이 큰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글 22쪽, 사진 214쪽) 한울엠플러스 제공
|
정치사회에디터 우울한 한 주였다. 2월25일 월요일. ‘의열단장 김원봉 막내동생 김학봉씨 별세’ 소식을 접했다. 얼굴 본 적 없는 34살 터울의 큰오빠가 해방 직후 돌아왔을 때 경남 밀양 고향 마을은 환영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약산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결성해 활동했고, 1938년 조선의용대장,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과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를 빼고 독립운동사를 기술하는 건 불가능하다. 김학봉은 이듬해 큰오빠에게 영어사전과 연필 두 다스를 선물받은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약산은 1948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터졌다. 약산의 형제 5명과 사촌 5명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했다. 김학봉은 종로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아버지와 남편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살아남은 형제 김봉철은 가족들의 명예회복 활동 등을 했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빨갱이 연좌제’가 독립투사 가족을 산산조각 냈다. 김학봉은 2005년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끝내 보지 못했다. 26일 화요일. 정부가 3·1운동 100돌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원봉에 대한 서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앞서 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김원봉처럼 남에서도 북에서도 사상이나 정치적 이유로 독립운동 공적을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적극 서훈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약산은 월북 후 중립화 통일 방안을 주장했고, 노동상 등을 지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보수언론·야당은 “김일성한테도 훈장 주자는 것이냐”고 반발했다. ‘빨갱이라 안 된다’는 얘기다. 김원봉은 독립기념관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특별판)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편찬위원장인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원봉 선생 원고도 준비했는데, 지금 정치적 상황에서 넣었다가는 출간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해 할 수 없이 뺐다”고 했다. 27일 수요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미스터 국가보안법’,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 대표가 선출됐다. 그의 지지층 가운데 하나는 ‘반공’을 신앙으로 삼는 보수 개신교다. 5·18 망언 김순례 의원도 최고위원이 됐다. 태극기부대는 항의 시위대를 향해 “빨갱이들 해체하라”고 외쳤다. 28일 목요일. ‘하노이 담판’이 결렬됐다. 텅 빈 오찬장의 식탁과 예정보다 일찍 떠난 에어포스원의 모습에 처량한 기분마저 들었다. 해방 후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친일’을 ‘반공’으로 세탁하고 기득권을 지켜온 세력들이, 남북이 평화로 가는 길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던 터다. 해방 뒤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모욕당하고 사흘을 통곡했다는 김원봉, 해방된 조국의 분단에 반대해 남북협상에 나섰던 김원봉을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매도하는 이들이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해도, 해방 이후의 행적으로 독립운동 사실 자체를 깎아내리거나 부인하는 건 냉전 체제의 인식이다.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현대사의 고비마다 우리 사회를 굴곡지게 한 족쇄로 작용했다고 짚었다. 화두는 반갑지만,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보훈혁신위 권고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면 어떠한가.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있는 약산의 흉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훈장을 새겨넣는 공간이 비어 있다. 그곳을 채워야 떳떳한 후손이다. jieuny@hani.co.kr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은 의열단, 조선의용대 활동을 함께한 항일무장투쟁 동지였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월북한 뒤 숙청당해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중국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순국한 박차정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