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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9 17:37 수정 : 2019.06.09 21:37

한국의 오세훈(9번)이 지난 1일 새벽(한국시각) 폴란드의 티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국제축구연맹(FIFA) 20살 이하(U-20)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전반 42분 헤딩선제골을 넣은 뒤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실컷 즐기고 돌아와라.”

이번 20살 이하(U-20) 월드컵 팀을 36년 만에 4강이라는 꿈의 무대로 쏘아올린 정정용 감독은 경기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경기를 즐기라”고 하는 건 정 감독만의 특출한 용인술이나 슬로건은 아니다. 지금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벤투를 비롯해 많은 감독들이 경기 전 선수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귀에 꽂힌다. 경기에 지면 이 말 한마디로 가루가 될 때까지 ‘까일’ 것을 걱정하는 한국인 감독은 내뱉기 힘든 말일 뿐 아니라 정 감독에게 ‘즐기는 축구’는 긴장풀기용 단순한 격려는 아니었지 싶다. 덕장으로 알려진 그는 실제 훈련 과정에서도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 대신 코치진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선수들은 즐길 수 있는 축구를 추구해왔다고 한다.

이런 정정용호가 세우고 있는 기록은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가 아닐까 싶다. 더이상 체벌과 단체기합, 폭언과 위협으로 운동선수들을 훈련시킬 수 없는 단계로의 도약이 이번 U-20 월드컵 4강 진출의 가장 큰 성과다. 사회의 어떤 분야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스포츠계이지만, 실제 청소년 축구 훈련 현장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게 현장 기자들의 이야기다. 축구라는 데 방점이 찍히는 건 아무래도 많은 인적 자원이 축구라는 주요 종목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뛰어난 선수도 많고, 또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니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지 않아도 선수들 각자가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다지기 위해 치열하게 연습한다. 현장이 바뀌고 있다는 건 이처럼 최선을 다하는 선수와 코치진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는 엘리트 육성 시스템 전면 혁신과 일반 학생의 스포츠 참여 활성화를 뼈대로 하는 학교 스포츠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정규수업 뒤 훈련과 논란의 합숙소 폐지뿐 아니라 선수들의 최저학력 도달 의무화, 엘리트 체육 시스템의 중간점검 단계와 같은 전국소년체전을 운동부, 학교 스포츠클럽의 통합 축전으로 확대 개편 등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권고안에 대해 대한체육회는 반발했다. 중국이나 일본도 엘리트 체육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며 “스포츠혁신위의 권고안으로 운동하는 어린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접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어쩌다가 수업을 제대로 듣고 합숙소 생활을 하지 않으며 단체기합을 받지 않는 게 청소년의 꿈과 희망을 뺏는 일이 됐을까. 사실 엘리트 체육은 죄가 없다. 사회의 어떤 분야든 이끌어가는 소수의 엘리트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엘리트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우는 최소한의 수업권도 박탈하고 짐승처럼 맞고 벌을 서야 획득되는 엘리트의 자격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연봉 수십억으로 심적인 구멍을 메꿀 엘리트들의 발판으로 전락하면서 높은 연봉도, 기초 소양도 얻지 못하고 폭력의 상처만 몸과 마음에 새긴 채 성인이 되어 세상으로 내던져져야 하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이다. 한창 자라나는 시기, 육체만큼이나 머리도 자라나는 십대에 인생 전부를 걸라면서 최소한의 다른 가능성을 싹둑 자르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엘리트 교육은 선수뿐 아니라 선수의 후원자인 학부모까지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다. 스포츠뿐 아니라 다른 진로도 마찬가지지만 불안과 공포를 원동력으로 이것이 아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교육과 훈육은 대다수의 ‘조금’ 뛰어난 재능들에게 돌이키지 못할 절망과 후유증만을 남길 뿐이다.

영화 <어벤져스>보다 재밌었다는 드라마틱한 승리를 가져온 정정용호는 12일 다시 우리 팀이 밟아보지 못한 4강전의 신화를 남겨두고 있다. 이기면 그 또한 좋겠지만 신화 따위 못 쓴다 한들 어떤가. 아직 한참 젊은 선수들에게는 앞으로 긴 운동선수로서의 여정과 그보다 더 긴 삶이 남아 있다. 실컷 즐기고 돌아오기를. 그들로 인해 즐기는 운동의 가치가 더 어린 후배들에게, 다른 분야의 선수들에게도 쭉쭉 뻗어나가 더 빛나게 되길 바란다.

김은형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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