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3 17:12
수정 : 2019.06.2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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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나경원와 원내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18일 오후 서울 국회 의장집무실에서 열린 국회의장 주재 교섭단체 여야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악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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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꼬박 75일을 휴업했다. 지난 20일 문을 열기는 했으나 자유한국당의 불참으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점을 고려하면 79일 연속 쉰 셈이다. 공공기관이든 사기업이든 조직 전체가 이렇게 긴 휴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국회 외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당 간 대립과 갈등은 민주주의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산과 법안 심의라는 국회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마저 내팽개친 채 몇개월째 원외에서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우는 것은 도를 한참 넘는 것이다. 한국당 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국회의원들은 특권의식에 빠져 아예 죄책감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라면 이런 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반민주적 포퓰리스트 대통령 탓에 그 명성에 금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버티는 것은 200년 이상 연륜을 쌓아온 민주주의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의 핵심에는 바로 의회가 있는데, 이 의회가 몇개월째 휴업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특파원 시절이던 2013년부터 매해 1월3일이면 워싱턴 연방의회에 갔다. 이날이 ‘개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모든 의원실이 문을 개방해 누구든 방문할 수 있다. 당시 한인 단체인 시민참여센터(KACE) 회원들과 함께 방문해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등 주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의회의 한해 일정은 쉽게 말하자면 개강일과 휴일, 방학 등이 표시된 대학 학사 일정표와 비슷하다. 매해 1월3일 ‘자동’ 개회해, 12월 중순까지 회기가 이어진다. 매해 말 공개되는 다음해 의사일정표엔 개원 날짜와 휴회일, 여름휴가만 표시된다. 일주일씩 10차례 정도 주어지는 휴회일은 공식적인 지역구 활동기간이다. 휴회일과 여름휴가(한달)를 제외한 기간은 모두 본의회가 열린다. 우리 국회가 다음 선거를 위해 사실상 연중 지역구 활동을 하면서 특별한 시기만 정해서 본회의를 여는 반면에, 미국은 이처럼 연중 개회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미국의 풍토에서 보면, 개원을 하니 마니를 놓고 몇개월째 허송세월을 보내는 한국 국회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것이고, 특권만 향유하고 일은 안 하는 모럴 해저드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 국회 본회의 개회일은 올해 3일에 불과한 반면에 미국 의회는 벌써 90일을 넘겼다. 지난해도 우리 국회 본회의 개회일은 39일, 미국은 175일이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선진국의 의회는 연평균 150일 이상 본회의를 열고 있다.
물론 미국 의회도 파행을 겪는다. 2013년 10월1일 오바마케어 법안 통과 문제로 백악관과 공화당이 극한 대립을 하면서 예산안이 통과하지 못해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가 빚어졌다. 이 사태로 당시 연방정부가 16일간 업무를 정지했지만 정작 의회는 문을 닫지 않았다. 오히려 의회는 의사당에서 수정법안의 통과 여부를 놓고 공방을 벌였고, 10월17일 타협점을 찾았다.
정치에서 합의 불가능한 사안은 없다. 그런데도 국회 문조차 제대로 열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골몰하는 행태는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권력에 눈이 먼 소수 특권층의 권력 놀음으로만 비칠 것이다. 지금 국회에는 시급히 통과시켜야 할 법안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특히 경기하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빈곤층과 재난 피해 지역민들은 하루빨리 추경안이 통과되길 바라고 있다. 추경안이 미흡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국회에 등원해 따져야 한다. 지금 정부가 제출한 추경안이 경기회복의 마중물 구실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야당이 이를 적극 제기하면 오히려 박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국회의 장기 휴업 사태를 막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우리 국회도 매년 1월 초 개원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거나, 헌법 개정 전에라도 매달 임시회를 열도록 국회법을 개정해 ‘연중 개회’를 관례로 만들어야 한다. 국회가 스스로 바꾸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박현
신문콘텐츠부문장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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