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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0 20:13 수정 : 2019.07.11 09:48

김회승
정책경제 에디터

스포츠 경기에서 반칙은 대개는 약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다. 힘과 실력이 달릴 때 저지르는 최후 수단이랄까. 그런데 요즘 국제질서에선 강자의 반칙이 새로운 게임의 룰이 된 듯하다.

강대국의 무역 보복은 일종의 ‘근린 궁핍화’ 정책, 즉 다른 나라의 손해를 발판 삼아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다. 일본의 수출 규제뿐 아니라 중국의 사드 보복, 미국의 관세 정책 모두 비슷한 성격이다. 2차 대전 이후 국제 무역질서에서 횡행하던 힘의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전세계 교역을 위축시켜 ‘모두의 손해’로 귀결되기에 오래전부터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반칙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과거엔 경제적 이익에 국한됐다면 최근 강대국의 무역 무기화는 정치·외교·안보 등 다목적 카드로 활용된다. 미·중·일이 최대 교역국인 ‘수출 대한민국’이 이들의 완력에 대응하는 게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진 이유다.

강자가 반칙까지 사용하면 약자는 당할 도리가 별로 없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 국가안보법까지 끄집어낸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어느새 상대국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룰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일자리와 투자 감소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압박에 밀려 국내 대기업들은 앞다퉈 북미 지역에 공장을 짓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몇몇 대기업은 사실상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고, 유커들이 떠난 국내 음식점·숙박업과 소매업은 여전히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가 저지른 반칙은 미·중의 반칙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당장에 닥친 일본의 참의원 선거용이라는 분석부터, 헌법 개정을 위한 로드맵 또는 세계 반도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지만, 분명한 건 한국만을 겨냥한 공개적인 경제 보복이라는 점이다. 아베 총리 스스로 과거사를 거론하며 “한국의 약속 위반에 대한 대응”이라고 부당성을 자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중국보다 솔직하고 미국보다 명확한 게 낫다고 해야 할지.

일본의 ‘한국 공격’을 바라보는 보수 야당·언론의 심사는 다소 복잡한 듯하다. 일본의 무역 보복 발표 직후 ‘한국의 강경한 대일 외교 탓’이라며 본말이 바뀐 해석을 내놓더니, 이젠 전문가들 입을 빌려 ‘일본에 맞대응은 더 큰 불행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훈계한다. 중국의 사드 보복 때는 왜 중국에는 아무 말도 못 하느냐며 강력한 대중 외교를 침 튀기던 이들이다. 중국보다 훨씬 공세적인 일본의 반칙에는 신중하고 너그러우니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주장의 행간을 보면,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합의’나 대법원의 징용 판결 개입 등 ‘국익을 위한 대승적 결단’을 모두 뒤집어 놓은 문재인 정부가 못마땅하다는 속내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힘의 논리는 현실이 아니냐는 주장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일본의 보복이 마치 합리적인 경제 행위인 것처럼 둔갑시켜 호도하진 말아야 한다.

국내 기업의 피해는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일본의 무역 규제는 이제 시작 단계인데, 벌써부터 관련 기업들이 문 닫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데는 동의하기 힘들다. 반도체 시장만 놓고 보면, 시장점유율 1·2위인 삼성·에스케이는 결코 눈 뜨고 당할 약자가 아니다. 공급 독점뿐 아니라 수요 독점이 작동하는 시장이기에, 일본의 글로벌 소재·부품 업체들도 삼성·에스케이가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팔 데가 별로 없다. 반도체는 지난해 말부터 수요가 줄면서 재고가 늘고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이참에 감산 등을 통해 재고를 털고 가격을 관리하면서 수익성을 높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국내 대기업들이 허둥대는 건 우리 산업 생태계의 불균형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대목이다. 글로벌 분업 체계에서 모든 걸 국산화로 해결할 순 없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완성 업체가 여럿 있는 나라에서 해당 분야의 핵심적인 소재·부품·장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를 정부와 기업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수십년 방치해온 기초 체력을 태권도 도장 며칠 보내는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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