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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3 17:31 수정 : 2019.11.14 09:19

김진철ㅣ산업팀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동행도 수행원도 없었다. 7년여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전시회(CES) 전시장이었다. 그는 2013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직후에도 비슷했다. 이건희 회장과는 달랐다. 이 회장은 건장한 수행비서가 늘 함께했다. 이 회장의 등장에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등 일가족과 삼성그룹 부회장단이 일제히 90도로 고개 숙이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말수 적은 이재용 부회장은 차분하고 겸손한, 때로 소탈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요새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그룹 총수들을 견주는 이야기가 많다. 최근 몇년 이들 그룹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산업 패러다임이 격변하는데 경영환경은 녹록지 않은 터다. 그룹마다 위기 대응의 방법이 같을 수는 없다. 공격적으로 새 화두를 던지는가 하면, 수성에 방점을 찍고 구조 개편을 서두르기도 한다. 덕분에 그룹 전체의 분위기가 크게 변모하며 활기를 띠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한두 걸음 앞서가는 듯 보이고 누군가는 암중모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삼성은 이 부회장의 ‘적극적 현장행보’를 강조하고 있지만 세간의 평가는 다르다. 묵묵히 낡은 여행가방을 끌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미래 신산업’과 ‘시스템 반도체’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이 발표됐지만 이 부회장은 여전하다.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유약하고 강단이 부족하며 이끌어 가는 힘이 달린다는 평가다. 리더십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목소리는 재계는 물론 정·관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아직 국정농단 사태가 종결되지 않았다. 삼성바이오 회계조작 사건까지 진행 중이다. 보폭을 넓히기 어려운, 여러모로 위축된 상황일 것이다.

시가총액 30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는 한국 경제에서 독보적이다. 전년 동기 대비 56% 줄었다는 3분기 영업이익이 8조원에 육박한다. 반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삼성 없이 세계 최초의 폴더블폰이 한국 기업에서 출시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삼성의 대규모 설비투자는 시름 많은 한국 경제에 단비와 같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만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박수 치고, 누군가는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것이다.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의 위기는 한국 경제의 위기와 무관하다 하기 어렵다.

수십년간 이어온 무리한 승계작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부회장이 책임을 피할 수 없으나 그의 잘못인 것만도 아니다. 시대착오적 행태에 부응하며 기생해온 정치와 검찰·법원·국세청, 언론과 학자들의 책임과 과오가 무겁다. 진실을 감추고 눈을 가려온 오랜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그릇된 길을 택하게 했다. 사회적 규칙을 가볍게 여기고 편법과 변칙으로 손쉽게 승계하려는 욕심은 그렇게 현실화되었고, 필연적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서야 삼성의 굴곡진 역사를 해소할 기회가 마련됐다. 삼성으로선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매우 중요한 길목에 삼성도, 이 나라도, 우리도 서 있는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자신의 언어를 정립해야 할 때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인식과 실천의 한계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참모가 있다 해도 스스로 언어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한계가 뚜렷하다. 정치의 간계에 결탁하지 않고, 권력의 유혹에서 초탈하려면, 언론이 벌여온 찬사와 과장의 말잔치로부터 거리를 두려면, 자신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첫걸음은 떼었다고 보고 싶다. 이 부회장은 지난 1일 삼성전자 50주년 기념사에서 “기술혁신은 우리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같이’와 ‘함께’라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더 나아가길 바란다. 과오를 겸허히 인정하는 용기의 언어, 오류를 바로잡는 성찰의 언어,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는 혁신의 언어를, 그가 갖췄으면 좋겠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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