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11일 북한이 수석대표로 통보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차관급”이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굴종을 강요하는 대화”라고 비분강개했고, 정홍원 총리는 국회에 나와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대화는 진실성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동안 남북 대화는 장관급 회담만 있었던 게 아니다. 총리회담도, 국방장관 회담도 열렸다. 10·4 선언 뒤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확대·발전된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도 있었다. 총리회담에는 남북 총리가, 국방장관 회담에는 국방장관과 인민무력부장이 마주앉았다. 남북경제협력공동위는 남쪽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과 북쪽의 내각 부총리가 회담을 이끌었다. 한눈에 봐도 모두 ‘격’(‘급’)이 맞는다. 그런데 통일부 장관이 나서는 장관급 회담만 북쪽에서 정체불명의 ‘내각 책임참사’가 나온다. 왜 그럴까? 북한 내각(한국의 행정부)에 통일부에 대응하는 부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남 업무를 맡은 인사 중 적임자라고 판단되는 인물에게 내각 책임참사라는 정부 직책을 임시로 달아 내보내는 것이다. 정부 설명대로 북이 남쪽의 굴종을 노렸다면, 다른 회담 다 제쳐두고 굳이 장관급 회담만 ‘격’이 미달인 인사를 내보냈을까?
당 우위 체제인 북한과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평통의 서기국 국장은 우리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사무처장(차관급)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대남 업무를 집행하는 조평통의 위상은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주평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조평통의 위원장은 오래전부터 공석이고, 부위원장은 대체로 명예직 성격이 강한 원로들이다. 서기국 국장은 조평통을 실제로 이끄는 ‘1인자 없는 2인자’인 셈이다.
정부가 수석대표로 요구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통전부장)은 통일부 장관과 같은 ‘급’일까. 통전부장은 북한의 대남 전략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우리의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대북 업무를 합쳐 놓은 업무를 본다. 특히 김 부장은 대남담당 비서를 겸해 우리의 외교안보수석 같은 업무도 맡고 있다. 북한 최고권력자의 최측근이다. 우리의 통일부 장관이 같은 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 경험으로 통전부장의 대화 상대는 대체로 통일부 장관보다 국정원장이거나 대통령 특사였다. 2000년 9월 김용순 당시 통전부장이 왔을 때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마중했다. 김양건 부장의 2007년 11월 방문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김만복 국정원장의 공동 초청으로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10월 김 부장은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싱가포르에서 비밀회담을 한 적이 있다. 정상회담을 위한 밀사 자격이었다.
정말로 ‘격’이 중요했다면, 정부는 김성혜 조평통 서기국 부장이 실무접촉 수석대표로 나오는 것부터 따졌어야 맞다. 우리 수석대표는 천해성 통일정책실장이었다. 조평통은 ‘부장-부국장-국장’ 체제다. 통일부는 ‘실장-차관-장관’ 체제다. 국장과 장관은 ‘급’이 다른데, 부장과 실장의 ‘급’은 문제가 안 된다는 논리는 일관성이 없다.
이번 회담은 모처럼 찾아온 남북 대화의 기회였다. 그런 회담의 파탄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 남북대화를 송두리째 ‘굴종’의 역사로 매도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남북 간 맺은 합의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 존중의 대상에 회담 관례는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회담의 폼격’?…차라리 총리급으로 ‘격’ 높여라 [한겨레캐스트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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