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우리가 무슨 열쇠도 안 들고 있는 금고지기인가? 마음대로 돈 퍼가시오 하고 있는….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기획재정부 아래 통화정책국 하나 만들면 되지, 뭐하러 중앙은행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해운·조선산업 등의 구조조정을 앞두고 ‘한국판 양적 완화’란 이름으로 한국은행의 돈 찍어내기를 연일 압박하고 나서자 한은 간부가 한 말이다. 청와대는 한국판 양적 완화를 여타 국가와 다른 ‘선별적 양적 완화’로 정의했다. 다른 나라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찍어서 무차별적으로 풀고 있다면, 한은은 기업 구조조정 목적에 국한해 ‘차별적으로’ 돈을 풀자는 얘기다. 케이디비(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한은이 직접 출자를 하든지, 산업은행금융채를 사주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 청와대 등이 양적 완화에 ‘한국판’이나 ‘선별적’이란 수식어를 굳이 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쓸 돈이 필요한데 재정을 쓰긴 싫으니, 한은에 손을 벌리고 싶다는 얘기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정부가 한은의 팔을 쉽사리 비틀던 관 주도 시절에 쓰던 ‘특별융자’란 고색창연한 말 대신에 요즘 뜨는 말인 ‘양적 완화’를 슬쩍 빌려다 썼을 뿐이다. 청와대는 “재정은 시간이 걸리고 한은은 빠르다”는 이유를 들어, 구조조정 재원 마련 창구로 한은을 선호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한은은 빠르다’가 재정을 쓰는 대신에 한은 돈 찍기를 활용할 이유가 될까? 구조조정을 위해 한은이 돈을 찍어내는 것은 특정 기업의 부실 책임을 전체 국민이 나누어 지도록 하는 것이다. 해당 기업들이 잘나가던 시절엔 대주주를 비롯한 주주들과 경영진 등 특정 이해관계자들만 과실을 누렸다. 하지만 어려워지니 국민 모두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승인이 필수적이다. 대주주와 경영진은 부실 책임을 졌는지, 죽어야 할 기업을 한은이 돈을 찍어 연명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 경제 회생에 필요한 구조조정의 밑그림을 그렸는지 제대로 살펴 그 판단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청와대가 거론한 양적 완화는 이런 복잡한 과정과 무거운 책임을 사양하려고 ‘꼼수’를 쓰는 것으로 비칠 소지가 크다. 재정 투입은 국회 합의의 실타래를 푸는 데 시간도 걸리고 책임의 꼬리표도 남아서 싫은데, 한은의 돈 찍어내기는 정치적 책임도 덜 수 있고 그만큼 국회 설득도 쉽다고 여겨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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