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마음으로부터 환영합니다. 70년 전 원폭 투하로 많은 이들이 무참하게도 희생됐습니다.” 10일 밤 긴장한 얼굴로 총리관저에서 기자들 앞에 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세계에서 최초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를 방문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본은 유일한 전쟁 피폭국으로 두번 다시 이 같은 비참한 체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핵무기 철폐를 호소해 왔습니다. 대통령이 피폭의 실상을 접해 이 마음을 발산하는 것은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향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멍한 표정으로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광경을 바라보면서, 전 세계에서 아마도 남북에 사는 우리 민족만이 공감할 수 있는 묘한 감정이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나미 출판사의 잡지 <세카이>의 지난해 12월호와 지난 2월호에 평생 동안 조선인(남북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조선인이라 쓴다) 피폭자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 온 이실근(88) 선생의 인터뷰가 두 차례 나뉘어 실려 있다. 1927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선생은 원폭이 터진 직후 히로시마 시내를 통과해 심각한 피폭을 당한 피해 당사자이기도 하다. 1977년 한국에서 태어나 손진두·곽기훈·김형률 정도의 이름으로 조선인 피폭 문제를 인식하고 있던 내게 선생의 인터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터뷰 속에서 선생은 외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1945년 8월6일의 얘기로밖에 피폭을 인식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일본이) 무엇을 해왔는지가 결락돼 있다. ‘왜 조선인 피폭자가 있는지’ 일본인들은 지금 다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원폭이 떨어지기까지 히로시마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다섯개의 커다란 전쟁을 통해 번성한 군사 도시로 성장했다. 당연히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산업이 발전했고, 이를 지탱한 것은 한반도에서 몰려든 값싼 노동력이었다. 그로 인해 1945년 8월 원폭이 투하됐을 때 일본인 뿐 아니라 수만명의 조선인들이 숨지거나 피폭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 한수산이 나가가키 원폭 투하의 참상을 다룬 소설의 제목은 <까마귀>인데, 일본인들이 조선말로 신음 소리를 내는 부상자를 돌보지 않아 버려진 주검에 까마귀들이 몰려들어 쪼아 먹었기 때문이다. 이실근 선생이 내리는 결론은 “역사를 뒤돌아보고 이와 단절하지 않는 한 ‘히로시마의 평화’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인 피폭자들에 대한 첫 언론 보도를 한 사람은 1964년 <주고쿠신문>에 근무하던 히라오카 다카시(88) 전 히로시마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게재 이후 “ 한국 관련 기사를 썼더니 피해자 단체로부터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썼더니 (돌아온 것은) ‘우리는 피해자’라는 얘기였다”는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히라오카는 회상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 자신들이 ‘유일한’ 원폭 피해자라고 호소할 뿐 정작 아시아엔 눈을 돌리지 않는다. 히로시마시가 시장 명의로 매년 피폭일에 발표하는 ‘평화선언’에 ‘식민지배의 책임’이 언급된 것은 히라오카가 시장으로 재직하던 1991년부터 수년에 그치고 만다. 이후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2010년 간 담화로 아시아에 말을 걸기 시작하던 일본의 역사 인식은 2015년 아베 담화로 다시 ‘서구 지향’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원폭 기념일 기념행사에 해외 피폭자가 초대된 것도 피폭으로부터 실로 반세기가 지난 1995년부터다.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하게 될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1999년 7월 이곳으로 옮겨진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일본 우익들이 가끔 몰려가 철거를 요구하는 바로 그 위령비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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