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17 20:19
수정 : 2017.09.17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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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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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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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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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함대를 포구에 정박시키고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이동하면 잠든 나의 함대는 저절로 이동한 셈이었다.”(김훈 <칼의 노래>)
‘책략’이 교차하는 통상분쟁에서 협상가가 가져야 할 전략적 사고를 언급할 때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줄곧 꺼내는 비유다. 내 위치는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 규정된다는 뜻으로, 통상분쟁은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란 얘기다.
지난 1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김 본부장은 ‘폐기·개정’ 앞에 놓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이건 국운이 따라야 한다”고 짧게 말했다. 다음날 청와대는 중국의 사드 경제보복 조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는 지금 (북핵·미사일) 국면에서 취할 카드가 아니다”며 제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조차 당분간 접었음을 내비쳤다. 이어 17일 산업통상자원부는 “(공식 제소와 별개로) 다음달 6일 열리는 세계무역기구 이사회에서 중국의 사드보복 철회를 촉구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도 여러 각도에서 (재)검토하고 있다”고 고뇌를 털어놓았다.
정부가 세계무역기구 제소에 신중한 배경에는 북한이라는 ‘한반도 지정학 정세’ 이외에도 ‘실익’의 문제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한번 제소 국면으로 사태가 빨려 들어가면 이후 전개될 상황은 ‘예측 불허’다. 한·중 양국이 경제보복으로 맞대응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우리 기업의 어려움이 당장 풀리기도 어렵다. 송기호 변호사(민변 통상위원장)는 “사드 문제는 세계무역기구 분쟁해결절차 위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승소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중국산 김치 수입관세율 인상처럼 중국산 수입품에 보복관세를 물리거나 한국인의 중국관광 금지 같은 맞대응 보복 조처를 세계무역기구로부터 허가받는 정도로 알려진다. 보복 철회나 피해 원상회복이 아니라는 얘기다. 김 본부장이 “제소 카드가 플랜-에이(A)라면, 그 후 벌어질 일에 대한 플랜-비(B), 플랜-시(C)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승소 역시 확신이 아니라 ‘가능성’일 뿐이다. 중국은 “당국이 공식적으로 보복조처에 나선 증거가 있냐?”며 발뺌하고 있다. 게다가 사드 같은 안보 문제는 한-중 자유무역협정상의 이행 의무에서 ‘예외’로 인정될 수도 있다. 이 협정문 제21조 2항(필수적 안보)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와 서비스교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 제14조는 이 협정에 통합된다”고 명시한다. 이 두 국제통상규범은 자국의 ‘중대한 안보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통상규제를 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을 담고 있다.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을까? 김 본부장은 13일 다소 엉뚱하게도 “(제조업을 넘어) 금융·보험 등 중국의 거대 서비스시장 개방을 확대하고 한-중 양국 도시 간 자유무역구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칼집에서 ‘세계무역기구 제소’를 빼들 것이냐에 집착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드 보복을 고리 삼아 중국이 교역확대 협상 테이블에 나오도록 이끌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움직여 상대방 위치를 바꿔놓겠다는 이런 전략도 우리의 ‘좁은 처지’를 보여주기는 마찬가지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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