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내세우며 거칠게 몰아붙였던 세계화는 지금 싸늘해져서 다들 돌아보는 것조차 꺼려 한다. 하지만 세계화의 열풍은 뜨거운 물에 잠시 겪은 화상도 아니고, 섣부른 편들기도 아니었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이자 이를 관통했던 내러티브의 문제였다. 후자를 편의상 세계주의(globalism)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따져볼 것은 수만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우선 두가지를 생각한다. 첫째는 평균이라는 편리한 방패막이다. 2016년 11월에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자유무역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면서 미국 제조업 노동자의 지지를 넓혀가고 있을 때, 저명한 경제학자 수백명이 성명서를 냈다. 트럼프의 잘못된 통계와 자의석 분석을 정면 공격했다. ‘오도한다’(mislead)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 성명서가 내놓은 대답은 “무역 혜택이 균등하게 분배되고 있지는 않지만, 소득과 부는 평균적으로 대폭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내 몫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있는 분배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는 옹색했다. 화가 잔뜩 난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들 경제학자야말로 ‘오도한다’고 생각할 법했다. 지난 세계화 시대에는 시민들이 분배에 대해 물으면, 답변은 늘 ‘평균적 개선’이었다. 분열되는 거친 현실을 가상적인 평균으로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돌이켜 보면, 이런 엇갈리는 ‘세계주의’ 대화에서 세계화가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둘째는 장소(location)에 대한 이상주의적 무시였다. 수시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다 보면 세상은 마치 탄탄하게 잘 연결된 유기체 같고, 국경이란 행정적 편의상 줄을 그어둔 것에 불과하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게다가 민족이니 국가니 하면서 처참한 싸움박질을 한 것도 불과 육칠십년 전이고 지금도 멱살잡이는 국지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니, 이 단어들을 멀리하고 싶은 세계평화주의적인 욕망도 강하다. 이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학력 고소득자다. 자신의 빛나는 전문직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기 때문에 민족이나 공동체와 같이 땀냄새 밴 것들은 피한다. 징글징글한 국내 정치에서 본전치기 설전을 벌이는 것보다,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세계공동체적 비전을 우아하게 밝히는 게 낫다. 그래서 ‘다보스 사회주의’는 농담 같은 현실이다. 물론 내게도 아프게 적용되는 얘기다. 하지만 폴 콜리어가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지적했듯이, 현실정치는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정치는 그곳에서 개별 시민들의 소속감(belonging)을 빚어내는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국제적 마인드’를 가진 엘리트와는 달리 일반 시민들은 일이나 노동을 통해 소속감을 찾기도 힘들다. 바야흐로 불평등의 확대와 일자리 불안정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뿌리내린 공간적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개별적 삶을 찾기 위한 일상의 발버둥인데, 그것을 실현해야 할 정치는 너무 ‘세계적’으로 멀리 있다. 정치와 경제를 자신의 공간으로 다시 불러오려는 노력에는 ‘낡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딱지가 붙는다. 정치적 거부감은 이 거리만큼 커졌고, 정치적인 빈 공간도 생겨났다. 그 빈자리는 트럼프류의 신종 ‘애국주의’ 정치가 메웠다. 물론 실패한 세계화의 대안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시민들이 살아가는 현실적 공간에 깊숙이 자리 잡은 공간적 정체성을 손쉽게 민족주의로 정의해서도 안 된다. 그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산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식한 대중의 열뜬 반응이라거나 영악한 정치인들의 노림수라는 식의 반응도 경계해야 한다. 경제에서 역사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말은 지적으로 흥미롭지만, 현실적이지도 옳지도 않다. 분노는 항상 현실적이다. 천박한 분노란 없다. 분노에 대응하는 천박한 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껴안고 길을 같이 헤아리는 것이 먼저다. 그 분노에 사회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적 해법을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못한 말은 한가한 훈계일 뿐이고, 역설적이게도 ‘낡은 민족주의’의 불쏘시개가 된다. 정치는 실제 역사를 공유하는 실질적 장소에 관한 것이다. 세계주의는 모든 이의 꿈을 좇지만 실제로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는다.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이해한다는 하버드대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이 한 말이다.
칼럼 |
[세상읽기] 세계주의를 경계한다 /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내세우며 거칠게 몰아붙였던 세계화는 지금 싸늘해져서 다들 돌아보는 것조차 꺼려 한다. 하지만 세계화의 열풍은 뜨거운 물에 잠시 겪은 화상도 아니고, 섣부른 편들기도 아니었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이자 이를 관통했던 내러티브의 문제였다. 후자를 편의상 세계주의(globalism)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따져볼 것은 수만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우선 두가지를 생각한다. 첫째는 평균이라는 편리한 방패막이다. 2016년 11월에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자유무역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면서 미국 제조업 노동자의 지지를 넓혀가고 있을 때, 저명한 경제학자 수백명이 성명서를 냈다. 트럼프의 잘못된 통계와 자의석 분석을 정면 공격했다. ‘오도한다’(mislead)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 성명서가 내놓은 대답은 “무역 혜택이 균등하게 분배되고 있지는 않지만, 소득과 부는 평균적으로 대폭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내 몫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있는 분배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는 옹색했다. 화가 잔뜩 난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들 경제학자야말로 ‘오도한다’고 생각할 법했다. 지난 세계화 시대에는 시민들이 분배에 대해 물으면, 답변은 늘 ‘평균적 개선’이었다. 분열되는 거친 현실을 가상적인 평균으로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돌이켜 보면, 이런 엇갈리는 ‘세계주의’ 대화에서 세계화가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둘째는 장소(location)에 대한 이상주의적 무시였다. 수시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다 보면 세상은 마치 탄탄하게 잘 연결된 유기체 같고, 국경이란 행정적 편의상 줄을 그어둔 것에 불과하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게다가 민족이니 국가니 하면서 처참한 싸움박질을 한 것도 불과 육칠십년 전이고 지금도 멱살잡이는 국지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니, 이 단어들을 멀리하고 싶은 세계평화주의적인 욕망도 강하다. 이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학력 고소득자다. 자신의 빛나는 전문직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기 때문에 민족이나 공동체와 같이 땀냄새 밴 것들은 피한다. 징글징글한 국내 정치에서 본전치기 설전을 벌이는 것보다,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세계공동체적 비전을 우아하게 밝히는 게 낫다. 그래서 ‘다보스 사회주의’는 농담 같은 현실이다. 물론 내게도 아프게 적용되는 얘기다. 하지만 폴 콜리어가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지적했듯이, 현실정치는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정치는 그곳에서 개별 시민들의 소속감(belonging)을 빚어내는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국제적 마인드’를 가진 엘리트와는 달리 일반 시민들은 일이나 노동을 통해 소속감을 찾기도 힘들다. 바야흐로 불평등의 확대와 일자리 불안정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뿌리내린 공간적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개별적 삶을 찾기 위한 일상의 발버둥인데, 그것을 실현해야 할 정치는 너무 ‘세계적’으로 멀리 있다. 정치와 경제를 자신의 공간으로 다시 불러오려는 노력에는 ‘낡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딱지가 붙는다. 정치적 거부감은 이 거리만큼 커졌고, 정치적인 빈 공간도 생겨났다. 그 빈자리는 트럼프류의 신종 ‘애국주의’ 정치가 메웠다. 물론 실패한 세계화의 대안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시민들이 살아가는 현실적 공간에 깊숙이 자리 잡은 공간적 정체성을 손쉽게 민족주의로 정의해서도 안 된다. 그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산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식한 대중의 열뜬 반응이라거나 영악한 정치인들의 노림수라는 식의 반응도 경계해야 한다. 경제에서 역사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말은 지적으로 흥미롭지만, 현실적이지도 옳지도 않다. 분노는 항상 현실적이다. 천박한 분노란 없다. 분노에 대응하는 천박한 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껴안고 길을 같이 헤아리는 것이 먼저다. 그 분노에 사회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적 해법을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못한 말은 한가한 훈계일 뿐이고, 역설적이게도 ‘낡은 민족주의’의 불쏘시개가 된다. 정치는 실제 역사를 공유하는 실질적 장소에 관한 것이다. 세계주의는 모든 이의 꿈을 좇지만 실제로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는다.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이해한다는 하버드대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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