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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1 17:23 수정 : 2019.08.21 19:02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오른손엔 칼, 왼손엔 청진기, 미개 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의학만 한 것이 없다.” “제군들이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던 군인이 될 문이 열렸으니, 얼마나 제군의 가슴은 설레고 혈관 속 피는 요동치는가? 지체 말고 돌진하라.”

첫번째 말은 남만주철도 초대 총재, 내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한 의사 출신 고토 신페이가 남만의학당의 의학도들 앞에서 한 연설이다. 당시 의학도로 그 자리에 있던 히에다 겐타로는 당시 아무런 반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의학자로서의 책임감, 탐구심, 자부심이 그들로 하여금 군대와 함께 일하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게 했다고 회고했다. 두번째 말은, 몇십년째 우리나라 모 대학 정문 앞에 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오긍선이 일제강점기에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며 쓴 글이다.

새삼스레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최근 일본 아베 정권과 국내 친일 세력에 대한 울분이 고조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비판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 때문이다. 소위 ‘애국’과 ‘가치중립’이라는 미명 뒤에 숨어 있는 학자들, 특별히 과학자들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같고,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위안부는 없었다고 외친 한 ‘비명예교수’를 비판하자, 그는 “당신은 나처럼 공부와 실험으로 매일 밤을 새워봤느냐”는 생뚱맞은 논리로 항변했다. “나는 당신의 그 ‘성찰 없는 열심’이 더 공포스럽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과학에 무지한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과학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정부위원회 과학자와 기술관료의 확신은 그 노회한 학자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바이오산업이 국가 성장동력이라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국민의 질병정보를 빼내고 국민을 실험도구로 삼고 관변화한 정부위원회를 앞세워 안전성·실효성도 검증되지 않은 약품의 허가를 내주는 데 앞장서고 있는 곳이 국가-의생명산업 공동체다. 이들은 한 손엔 청진기, 다른 손엔 칼을 든 고토 신페이, 오긍선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지난 7일 열린 한 국책기관 세미나 발표문에 따르면, 국방 분야의 드론·로봇 연구개발에 향후 5년간 1조2500억원 이상의 정부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발표자들은 한결같이 “선진 방위산업 육성을 통한 국가 신성장동력의 확보”를 외쳤다. 얼마 전 국립대학교인 카이스트가 모 방위산업체와 함께 국방인공지능융합연구센터를 세워 킬러 로봇을 만들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나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최종적으로 오해였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전쟁 무기에 사용하는 기초 기술 개발 목표는 부인하고 있지 않다. 이런 ‘산학 연대’는 1932년 총동원체제기 일본이 ‘학술진흥회’를 만들어 기업의 이윤 창출 사업과 방위산업으로 대학교의 연구 방향을 전환시킨 정책, 생물학 무기 개발을 진행한 731부대와 기꺼이 협력하던 일본의 의과대학들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어설픈 양비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은 분명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우리는 전 세계 시민사회와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 못지않게 우리 안에 청산되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것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 버린 우리 자신 속 괴물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괴물은 우리 가족, 학교, 직장, 관변화한 위원회, 국회, 정부라는 공간에서 나의 친척, 배우자, 스승, 정부 관료, 국회의원, 정권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국익 지상주의’를 신조로 한 연구재단의 연구비 배분, 신약, 신의료기술 심의, ‘규제 샌드박스’ ‘인보사 허가’ ‘영리 유전자검사 허용’, 더 나아가 ‘핵 마피아와의 결탁’ ‘방위산업’ ‘파병’ 등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제 살을 도려내는 구체적인 현장 싸움 없이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반성 없는 전범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은 의미 있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내부의 적과 싸우는 일은 바다 건너 아베 정권과 싸우는 일보다 백배, 천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상대편 무리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자신과 동료들의 얼굴 때문에 손에 움켜쥔 돌을 던지기 어려운 싸움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싸움터에서 있어 왔다. 자기 성찰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게으른 자이거나 위선자일 뿐이다. 왼손에 청진기를 들었다면 오른손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는 프랑스 혁명 직후 다음과 같은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폴롱 노인을 기억할 겁니다. 배가 고프면 풀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던 늙은이 말입니다./ 모두 기억하오!/ 그 놈이 우리 중에 있다는 군요!/ 안 죽었소?”/ 죽지 않고 살아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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