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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9 17:33 수정 : 2019.09.09 19:02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나온 어느 칼럼의 제목이다. 엄마의 딸이며 딸의 엄마인 내가 그 추석에 대해 쓰려 한다. 여성에게 추석이란 결혼하지 않은 자, 이미 돌아온 자의 표정과 여전히 며느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지는 때다. “일가친척 오랜만에 만나 맛있는 음식 나누고 덕담 주고받으며 행복한 한가위 맞으라는 뻔하디뻔한 말에 울화 치민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는 엄마 집에 가고, 아빠는 아빠 집에 가. 나는 우리 집에 남아 있을게. 여기가 내 집이거든.” 어느 해 추석, 딸은 말했다. 순간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100년을 단위로 구분되는 세기의 모퉁이에서 우연히 조우한 서로 다른 세대 간 여성들의 추석 이야기.

“너 같은 딸 낳아서 똑같이 당해보라”는 엄마의 소원이 실현됐다. 만취되어 돌아간 집 앞에서 등 두드려주며, 엄마가 가라는 길의 정반대에 서서 ‘와이낫’ 하고 독기 쏘는 딸년을 쳐다보며 하신 말씀이었다. 스무살이 된 내 딸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연락하라는 메시지가 자주 씹히며 알코올은 혈관과 디엔에이를 타고 흐른다는 것을 확인하며, 드디어, 마침내! 우리 엄마 소원성취하셨다, 고 전화드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아주 어렸을 적 말도 안 되는 떼를 부리자 말씀하셨다. “네 엄마 괴롭히면 안 돼. 할머니의 소중한 딸이란다, 아가야.”

별다른 인생의 족적을 남기지 못한 여자. 그러나 빛날 만큼 총명해 소학교 동창들에게 여전히 똑똑한 순택이로 기억되는 사람, 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가시나가 무슨 학교냐며 손찌검당했던 어린 여자애, 오빠 뒷바라지 위해 고사리손으로 살림을 살아야 했던, 결혼하고 나서도 가난을 못 벗어나 겨울엔 추웠고 여름엔 숨이 막혔고, 그래도 독하게 한푼 두푼 모아 삼남매 학교 다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내고, 이후로도 손주 둘을 직접 키워낸 엄마, 그냥 아주 평범해 빠진 우리 엄마 순택씨.

이렇게 쓰고 보니 엄청 다정한 모녀 같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그녀의 아들들 말에 따르면 전생의 원수 아니면 쥐와 고양이였을 것이라 추정될 만큼 으르렁거렸다. 모범생인 그녀 눈에는 차렷 자세로 서 있지 못하는 딸이 천하의 골칫거리였다. 나는 그녀 말을 모두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었다. 엄마는 벗어나고 싶은 족쇄였다. 하지만 딸을 낳은 뒤 바뀌었다. 엄마 안의 여자를 발견했다. 내 안의 여자와 엄마 안의 여자가 만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로 간 인내가 자리했다. 인내가 자리하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동지로서 자신이 살아낸 긴 인생의 정거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에서 엄마는 작은 여자애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조금씩 자라고 늙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근대를 살았다. 가부장의 그늘은 지금보다 훨씬 깊었다. 가난은 여성에게 더 가혹했다. 재능이 있건 없건 비슷한 생애를 살았다. 그녀들의 보호자거나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남자는 아빠에서 오빠로, 남편으로 바뀌었고, 남편이 사라지면 아들이 서 있었다. 반면 그녀의 딸들은 현대를 살았다. 학력이 높아졌고 자의식이 자랐으며 보호받거나 보호하는 노력을 덜 기울이려 안간힘 쓸 여유가 생겼다. 근대가 현대를 키우며 격돌한 갈등의 결과는 반쯤은 근대와 반쯤은 현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 또래 여성들은 엄마 세대 영향권을 벗어나는 징조와 잔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밀레니얼 세대인 딸을 보며 문득 궁금했다. 현대가 낳은 현대의 딸은 내 엄마가 가진 근대의 상처를 어떤 식으로 각인하고 있을 것인가. 너의 말을 다 알아듣는, 너의 싸가지 없음을 쿨한 지성으로 받아낼 준비조차 갖춘 엄마를 둔 너희 세대는 내 엄마 세대가 흘린 피눈물이라거나 네 엄마 세대가 비스듬히 서 있던 어중간한 비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

21세기를 훌쩍 넘긴 올해의 추석에도 여전히 현대에 살지 못하는 ‘이순택씨들’은 그녀의 며느리들과 함께 남편들 조상과 친족들을 위해 음식을 차릴 것이다. 그녀의 딸들은 자기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시집 눈치를 보며, 남편 옆구리 찔러 죄지은 자처럼 친정으로 떠날 것이다. 이제는 찾아갈 엄마도 친정도 없어진 이순택씨들에게 ‘너는 네 집에, 나는 내 집’에 갈 수 있는 추석이라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타인의 별에서 살아가는 이순택씨에게 추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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