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0 18:05
수정 : 2019.10.21 13:52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지난번 칼럼
‘대학입시, 개선이 아니라 폐지가 답이다’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한국과 독일은 상황이 다르다”며 대입 폐지 주장은 “비현실적”이라는 따끔한 비판도 있었고, “사회 전체의 가치관이나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서 입시만 폐지한다고 되느냐”는 타당한 지적도 있었다. 대체로 맞는 말들이다. 그 칼럼에서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으로 독일의 경우를 소개하려는 의도였기에 지면 관계상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독일의 경우와 비교하며 대입 폐지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학입시 폐지는 요원한 꿈도, 터무니없는 이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선 현 정부의 핵심 공약들을 실천하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자사고, 외고, 국제고 등 특권학교 폐지를 통한 고교 서열화 해체와 국립대학 네트워크화, 사립대 공영화를 통한 대학 서열체제 완화는 현 정부의 핵심 공약이다. 이 공약만 실현돼도 살인적인 교육경쟁은 대폭 완화될 것이고, 대학입시 폐지도, 경쟁 없는 학교도 가시권에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를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정의와 연대의 포용사회로 바꾸는 대전환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독일의 경우처럼 대학입학시험이 없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아비투어)만 합격하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갈 수 있는 제도를 가능하게 한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대학의 평준화다. 독일은 베를린 훔볼트대, 하이델베르크대처럼 ‘전통 있는 대학’은 있지만, 우리처럼 ‘일류 대학’은 없다. 엘리트 대학도, 대학 서열도 없이 모든 대학이 평준화돼 있고, 또 거의 모든 대학이 국립대학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유롭게 대학과 학과를 택하고 옮길 수 있다.
여기서 늘 따라다니는 질문은 인기 학과로 몰리는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독일에도 학생들이 선호하는 인기 학과가 있다. 대체로 문과에선 심리학과, 이과에선 의대가 인기가 좋다. 그런 학과를 ‘정원제한학과’(NC)라고 한다. 정원제한학과의 학생 선발 방식은 대학마다 다르다. 과거에는 추첨을 가장 많이 이용했지만, 요즘엔 아비투어 성적을 반영하는 대학도 많다. 그러나 여기엔 제한이 있다. 성적은 20% 이상은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 20%는 대기 연한을 반영해야 하고, 60%는 대학이 자유재량으로 결정한다. 즉 독일에서는 성적이 조금 모자라는 학생도 3~4년 대기하면 의대에 갈 수 있고, 그 기간 동안에는 관련 분야의 학점을 미리 따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성적이 미흡하지만 대기 기간을 통해 입학한 학생들이 더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는 연구 보고서도 많다.
독일의 대입 제도는 우리에겐 매우 꿈같은 ‘비현실적인’ 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적으로 매우 ‘생산적인’ 제도이다. 독일은 모든 학생들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은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만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은 자신이 원치 않는 분야에서 능력과 개성을 탕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입시는 한국인의 잠재력을 고사시키는 제도다. 입학시험 한번으로 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하고, 이에 실패한 자에게는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마저 박탈한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로 보면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사장되고 마는 것이다.
대학입시 폐지는 물론 지난한 길이다. 그것은 사회적 인식과 사회 구조의 변화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엇보다 학벌에 따른 문화적 차별 의식과 사회적 불평등 구조가 혁파돼야 한다. “아추비(고등학교 졸업자)는 벤츠 타고, 아비(대학 졸업자)는 골프 탄다”는 독일의 현실은 우리에겐 여전히 먼 길이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다.
한국에서 교육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개혁의 불철저성에 있다기보다는 개혁의 방향성과 목표가 잘못됐다는 데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가열찬 경쟁을 부추기는 ‘개혁’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아이들이 어떤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가, 교육 개혁은 이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한경쟁 사회, 학벌강박 사회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끼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경쟁을 통한 배제’에서 ‘연대를 통한 포용’으로 교육의 원칙을 바꿔야 한다. 모든 아이들의 잠재력이 한껏 발현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대학입시 폐지가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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