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8 17:21
수정 : 2019.10.29 02:40
홍은전
작가·인권기록활동가
세월호 참사 2000일을 맞이해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에서는 팟캐스트 <416 구술라디오: 맹꽁이와 나비의 말>을 열었다.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 이야기 열다섯편을 중견 성우들이 낭독한 것이다. 세월호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 힘들지 않나요?” 기록하는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이 힘이 드는 동시에 힘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장면들은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언젠가 내 마음이 힘들 때, 남들은 참 쉽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만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때 꺼내볼 수 있도록. 가령 이런 장면들.
지성 엄마 명미씨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도로에 차를 끌고 나갈 수 없어 10년 동안 면허증을 갖고만 있었다. 시장을 갈 때도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참사 후 남편은 416티브이 활동을 하느라 잠잘 때 외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미씨는 남편을 보기 위해 분향소에 나갔고 남편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로 귀가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불현듯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명미씨는 생각했다. “누구나 한번씩 그런 때가 오잖아요. 스스로 다짐할 때. 자기 변화가 올 때.” 그는 곧바로 학원에 찾아가 운전 연습을 했고 마침내 차를 끌고 도로로 나왔다.
명미씨는 카메라를 든 남편을 태우고 팽목항도 가고 청와대도 갔다. 최루액과 물대포가 난무하는 집회 현장도 갔다. 자식 잃은 엄마는 두려울 게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는 시종 말했다. 너무 두려웠다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건 본 적이 없다고. 여자는 나서면 안 된다는 굴레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명미씨가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부들부들 떨면서 커다란 차를 몰아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나는 조금 웃게 된다. “너무 버거웠는데 도망가지 않았어요” “내가 그걸 잘하나 봐요, 버티는 거”라는 말에 묻어나는 담담한 자부심이 너무 좋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2015년 4월16일 광화문광장에서 유가족들이 삭발을 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지는 현장에 영만 엄마 미경씨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미경씨는 아직도 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하고 있었다. 전날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삭발한다고 하는데 나도 할까?” 보수적인 남편이 반대를 하면 그 핑계로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남편은 망설임 없이 “해야지” 했다. 미경씨 가슴이 철렁했다.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며 손가락질하던 자신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삭발이라니. 너무 두려워서 광화문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광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망설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경씨가 말했다. “근데 웃긴 게요. 제가 갈등을 하면서도 앞에서 머리 자르는 사람들을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누가 이쁘게 잘라주는지 보려고요. 머리를 미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더라고요. 지켜보다가 예쁘게 잘라주시는 분 앞에 얼른 가 앉았어요.” 미경씨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읽어준 것은 머리를 밀어주던 여성이었다. 그가 미경씨를 뒤에서 안아주며 “어머니,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미경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뉴스에서 엄마의 삭발 소식을 듣고 한참 울던 아들은 늦은 밤 만난 엄마의 민머리를 보며 말했다. “엄마, 예뻐요.” 나는 이 장면을 아주 사랑한다.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는 마음은 광장에서 미경씨의 머리를 밀어주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던 여성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슬픔을 맡겨주는 것이고, 나는 되도록 그의 떨림과 두려움을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416 구술라디오 맹꽁이와 나비의 말, 많은 청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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