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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9 18:25 수정 : 2019.12.30 14:53

류영재 ㅣ 춘천지방법원 판사

1000일이 훌쩍 넘었다. 권태기처럼, 아니 마치 헤어진 것처럼, 사법농단은 잊혔다. 2019년의 마지막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국회는 밀린 숙제 하듯 선거법, 병역법 등 중요한 법들을 개정했다. 그러나 법원개혁 입법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2017년과 2018년을 뜨겁게 달궜던 사법농단 사태를 간략히 정리하기란 쉽지 않지만, 크게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강제동원 재판 등에 관한 법원행정처와 청와대 사이의 협의 ②법원행정처의 청와대 및 국회에 대한 재판 관련 정보 제공 내지 재판 컨설팅 ③법원행정처의 개별 재판 개입 ④법원행정처의 판사 사찰 및 특정 연구회 해체 시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산하 법원행정처 판사들은 밖으로는 재판권과 재판 전문성을 무기로 삼아 청와대 또는 국회에 협력하거나 협상을 시도했다. 안으로는 인사권을 무기로 재판을 통제하거나 판사들을 사찰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다. 주권자인 국민은 자기 스스로의 지배만을 받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국민을 지배할 수 없다. 사회는 법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국민은 헌법을 만들고 국회는 헌법에 합치되는 법률을 만든다.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통치한다. 사법은 국회와 정부가 헌법과 법률에 따르는지 견제한다. 그러한 사법권 행사도 헌법과 법률에 구속된다. 즉, 헌법의 큰 틀 아래에서 입법·행정·사법이 누구 하나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상호 견제할 때, 그로 인해 모든 공권력 행사가 헌법에 실질적으로 구속될 때, 국민은 헌법을 통한 자기 지배를 실현한다. 만일 입법·행정·사법이 한통속이 된다면 헌법이 힘을 잃는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통치권력이 되고 국민은 그 앞에서 피지배자로 전락한다.

사법농단은 사법이 스스로 청와대에 대한 견제 기능을 포기하고 재판을 통해 국정에 협력하며 통치권력이 되고자 한 사안이다. 그 결과 삼권분립 원칙이 무너지고 재판독립이 흔들렸으며 국민이 피지배자로 몰락할 위험에 놓였다.

어떤 이들은 사법농단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선 재판독립, 사법독립을 강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과연 사법농단이 독립을 보장받지 못해서 발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법원장에게만 오롯이 집중된 사법행정 권한, 사법행정 비공개, 판결문 비공개, 재판에 대한 비판마저도 재판독립 침해로 바라보는 배타적 자세. 사법농단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 사법은 지나치게 독립되어 있었고, 견제와 감시 체제는 지나치게 부족했다. 어떠한 견제도 감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법이 스스로 조직 강화를 꾀하다 발생한 것, 그것이 사법농단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법농단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법의 독립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법의 민주적 통제를 실질화해야 한다. 사법부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둘러싼 힘들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 권한을 분산하고 개방해야 한다. 비밀리에 수직적으로 행해지던 사법행정이 투명하게 공개된 상태에서 수평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재판에 대한 민주적 통제도 필요하다. 판결은 공개되어야 하고 판사들은 재판을 통해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판사들이 재판할 때 인사권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재판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많은 것들―인권, 시대정신의 변화, 재판당사자들의 재판받을 권리 보장 등을 두루두루 신경 쓰게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최근 판사들을 상대로 법관 외부평가 도입에 관한 설문이 실시되었다. 놀랍게도 외부평가 도입 찬성이 설문 1위를 차지했다. 돌이켜보면 2017년 사법농단 진상규명을 시리게 외쳤던 이들은 전국 대다수 판사들이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그로부터 3년째 법원개혁안을 의결하고 있다. 사법독립만을 강조하던 판사들에게 사법의 민주적 통제는 낯설고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사법농단을 밝혀내고 반성한 판사들은 이제 낯선 개혁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2019년 세밑, 사법농단이 알려진 지 1000일이 지났고 개혁에 대한 관심은 꺼진 듯하다. 그러나 사법이 변해야 한다는 점 자체는 국민에게도 판사들에게도 아로새겨진 것 같다. 한없이 느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 의지가 꺾이진 않았다. 2020년은 국민이 사법의 주인 자리를 온전히 되찾는 해가 되길 바란다.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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