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5 17:50
수정 : 2020.01.16 09:23
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영화 <기생충>의 다양한 국외 포스터 중 프랑스에서 제작한 아트 포스터가 눈에 띈다. 박 사장 집과 기택네 반지하 집이 한 건물의 위아래를 차지하고 있다. 기택네 가족은 반쯤 물에 잠긴 집에서 빠져나와 건물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반면, 박 사장 가족은 집 안에서 평화롭게 밖을 내다보고 있다. 포스터는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 빈부의 공간적 위계를 보여주지만, 꼭대기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박 사장 집의 풍경은 사회의 진짜 ‘기생충’이 누군지 되묻는 것 같다.
실제 우리 시대 가진 자의 기생은 도를 넘은 지 오래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관한 크리스티안 마라치의 논평에서 보듯 금융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이윤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전환시키는 첨병 노릇을 해왔다. 곧 출간될 이혜미 기자(한국일보)의 책 <착취도시>는 이 금융자본주의 신도들이 서울의 쪽방촌과 대학가 원룸을 어떻게 빈곤 비즈니스의 프런티어로 만들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쪽방 주민은 타워팰리스보다 높은 평당 임대료를 물면서도 냉동고 같은 방에서 전기장판에 의지해 겨울을 버틴다. 타워팰리스 주민에서 유명 학원 강사까지 다양한 임대업자들은 주검에 가까운 생명을 쪼아대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노후 대비”라 당당히 변호한다. 빈자들은 돈만 뜯기는 게 아니다. 이들의 육체는 때로 의료진의 실험 대상이 되고, 이들의 신원은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연구자와 창작자도 종국엔 빈곤에 기생하기는 매한가지다. 빈곤은 대한민국의 치부지만 빈곤을 담은 예술은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인다. <기생충>은 전세계 영화제를 차례로 휩쓸더니 어느덧 오스카 수상을 초미의 관심사로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의 블랙 유머, 할리우드 스타들의 찬탄, 하물며 통역자의 뛰어난 영어 실력까지, <기생충>은 한 언론의 보도 그대로 “미국을 제대로 홀렸다.” 봉 감독은 오스카 역시 미국 “로컬” 영화제일 뿐이라며 뼈있는 농담을 건네지만, 이미 수상식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한국 사회는 하루에도 수십건의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로 골든글로브를 수상했고, 미국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란다. 방탄소년단(BTS) 팬클럽이 봉 감독에게 뮤직비디오를 찍어달라 청원한 얘기까지 기삿거리다.
이 영화가 빈곤과 불평등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빈곤이라는 전세계의 보편적인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국외에서도 유효”하다는 촌평만큼 빈곤의 무게는 한껏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영화가 개봉되고 지금까지 한국 사회 빈자들의 삶은 여전히 죽음과 한뼘 떨어져 있을 뿐이다. 전남 여수에서 중증장애인 취업활동 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한 뇌병변 장애인은 실적의 압박을 못 견디고 자살했다. 김용균법이 지지부진한 사이 노동자들은 연일 산재로 목숨을 잃었다. 생활고로 일가족이 목숨을 끊은 사건은 수시로 발생해서 몇년 전 ‘송파구 세 모녀 사건’처럼 대중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책임자 처벌이 갈수록 요원한 용산참사는 곧 11주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평화처럼, 사랑처럼 “전세계 보편 소재”인 빈곤을 다룬 영화는 대한민국 못지않게 불평등 잔혹사로 악명 높은 미국에서 인정받았고, 오스카를 국민 모두의 염원으로 만들고 있다.
초기의 단편영화부터 <기생충>까지 단 하나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나는 봉준호 감독의 열혈 팬이다. 그를 가까이서 본 건 6년 전 그의 모교이자 나의 직장인 연세대에서였다. 경제논리를 앞세워 강행한 캠퍼스 대공사를 막겠다고 학생, 교수, 동문이 힘겨운 싸움을 벌였을 때 봉 감독도 힘을 보탰다. 추운 밤 야외 영화제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완성도가 들쭉날쭉한 학생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하던 모습이 선연하다. 공사가 강행된 뒤 새로 닦인 백양로에서는 지금도 인원 감축에 따른 노동 강도 증가에 맞서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외로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몸뚱이 위로 “자랑스러운 동문 봉준호”를 기리는 펼침막이 펄럭이는 장면을 그가 정말 원할까? 다수의 꿈이 건물주이고, 저소득층 지역의 아이들이 “빌거” “월거지” “이백충”이라 조롱받는 이 나라에서 “자랑스러운 국민 봉준호”를 기념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겸연쩍지 않을까? 나 또한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응원한다. 그래서 영화가 건넨 문제의식이 대학에서, 한국과 세계에서 재조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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