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장애학연구자 상대방의 입에서 “오냐오냐”라는 표현이 나오면 당신은 공동체 내에서 평등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혹 자신이 과도한 이익 주장을 하는 건 아닌지 염려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의사들이 직역의 이익 수호를 위해 거리시위에 나서거나 특정 지역에 장애인특수학교가 생겨 주민들이 극렬히 반발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들에게 (여러 이유로 비판은 할지언정) ‘오냐오냐’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남구민들 진짜 오냐오냐하니까!”라거나 “의사들 오냐오냐하니까 이것들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 분노한 일부 남성 누리꾼들의 글을 봤다. “남자들이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끝도 없구나”, “전쟁나면 K소총 가지고 ‘메갈'부터 죽인다”는 반응은 페미니즘이 돌파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낸다. 장애인들이 봉사활동에 의존해 살아가다 어느 날 권리 주장을 위해 거리에 나섰을 때 들었던 말도 비슷했다. “오냐오냐 봐주니까 이것들이 진짜, 장애가 벼슬이냐!” 페미니즘과 장애인운동 등 최근 격렬히 일어나는 이른바 소수자 운동에 대한 비판은 성별과 장애 유무 상관없이 공동체의 모든 시민이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권력(물리력)이 없는 존재들을 “오냐오냐” 봐주고 있기에 시민들의 평등한 관계가 (시혜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사회의 열린 논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다. 신체적으로 힘이 없는 남자, 물리력을 동원할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장애인과 노인, 대다수의 여성들은 정말 권력이 “오냐오냐해주는” 덕에 편안하게(?) 자신의 권리 주장을 하고 있는가? 실상 모든 규범은 집단 간 힘의 균형과 타협의 산물이다. 이들 다수는 물리력도 이를 동원할 정치권력도 없지만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경찰 앞에서 알몸으로 버티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떠올려보라. 2000년대에는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생존과 이동의 권리를 외치며 싸웠는데, 그때 장애인들이 한 일은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기어가고, 지하철 전동차 앞에 누워 버티기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민권운동은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 백인전용 좌석에 “앉아 있어서” 시작됐다. 이들은 곧 공권력에 끌려갔지만 할 수 있는 한 버텼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강력한 물리력이나 정치권력 없이도 규범적 질서를 확립하고 확장하는 막강한 힘을 보여줬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에서 시민들은 서로 간에 “오냐오냐하니까 어디서 감히!”를 외치고, 국가권력은 국민의 저항을 “오냐오냐”하며 지켜본다. 그러다 ‘선’을 넘으면 차벽을 치고 경찰력(때로는 군)을 동원한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냐오냐”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순간은 딱 하나뿐이다. 국가권력이 남용되고 부패하여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다. 시민에게 감히 권력을 남용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하고 버티고 막아서면서 우리는 이들을 구치소에 옮겨다 놓았다. 그 자리에는 남성, 여성, 노인, 장애인 모두 있었다. 페미니즘과 장애인 인권에 대해 격렬히 토론하고 논쟁하도록 하자. 다만 어느 쪽에서도 ‘물리력’이나 그것을 동원할 정치권력을 내세워 한쪽을 “오냐오냐”해주고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누가 누구를 봐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시민들이 ‘힘’의 크기와 관련 없이 완전히 평등한 관계이기를 꿈꾸지만, 설령 힘이 요구된다 하여도 버티고 살아남는 힘의 차이는 거의 없고, 그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동등하다.
칼럼 |
[야! 한국 사회] 오냐오냐 / 김원영 |
변호사·장애학연구자 상대방의 입에서 “오냐오냐”라는 표현이 나오면 당신은 공동체 내에서 평등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혹 자신이 과도한 이익 주장을 하는 건 아닌지 염려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의사들이 직역의 이익 수호를 위해 거리시위에 나서거나 특정 지역에 장애인특수학교가 생겨 주민들이 극렬히 반발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들에게 (여러 이유로 비판은 할지언정) ‘오냐오냐’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남구민들 진짜 오냐오냐하니까!”라거나 “의사들 오냐오냐하니까 이것들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 분노한 일부 남성 누리꾼들의 글을 봤다. “남자들이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끝도 없구나”, “전쟁나면 K소총 가지고 ‘메갈'부터 죽인다”는 반응은 페미니즘이 돌파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낸다. 장애인들이 봉사활동에 의존해 살아가다 어느 날 권리 주장을 위해 거리에 나섰을 때 들었던 말도 비슷했다. “오냐오냐 봐주니까 이것들이 진짜, 장애가 벼슬이냐!” 페미니즘과 장애인운동 등 최근 격렬히 일어나는 이른바 소수자 운동에 대한 비판은 성별과 장애 유무 상관없이 공동체의 모든 시민이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권력(물리력)이 없는 존재들을 “오냐오냐” 봐주고 있기에 시민들의 평등한 관계가 (시혜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사회의 열린 논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다. 신체적으로 힘이 없는 남자, 물리력을 동원할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장애인과 노인, 대다수의 여성들은 정말 권력이 “오냐오냐해주는” 덕에 편안하게(?) 자신의 권리 주장을 하고 있는가? 실상 모든 규범은 집단 간 힘의 균형과 타협의 산물이다. 이들 다수는 물리력도 이를 동원할 정치권력도 없지만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경찰 앞에서 알몸으로 버티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떠올려보라. 2000년대에는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생존과 이동의 권리를 외치며 싸웠는데, 그때 장애인들이 한 일은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기어가고, 지하철 전동차 앞에 누워 버티기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민권운동은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 백인전용 좌석에 “앉아 있어서” 시작됐다. 이들은 곧 공권력에 끌려갔지만 할 수 있는 한 버텼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강력한 물리력이나 정치권력 없이도 규범적 질서를 확립하고 확장하는 막강한 힘을 보여줬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에서 시민들은 서로 간에 “오냐오냐하니까 어디서 감히!”를 외치고, 국가권력은 국민의 저항을 “오냐오냐”하며 지켜본다. 그러다 ‘선’을 넘으면 차벽을 치고 경찰력(때로는 군)을 동원한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냐오냐”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순간은 딱 하나뿐이다. 국가권력이 남용되고 부패하여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다. 시민에게 감히 권력을 남용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하고 버티고 막아서면서 우리는 이들을 구치소에 옮겨다 놓았다. 그 자리에는 남성, 여성, 노인, 장애인 모두 있었다. 페미니즘과 장애인 인권에 대해 격렬히 토론하고 논쟁하도록 하자. 다만 어느 쪽에서도 ‘물리력’이나 그것을 동원할 정치권력을 내세워 한쪽을 “오냐오냐”해주고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누가 누구를 봐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시민들이 ‘힘’의 크기와 관련 없이 완전히 평등한 관계이기를 꿈꾸지만, 설령 힘이 요구된다 하여도 버티고 살아남는 힘의 차이는 거의 없고, 그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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