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바빠도 포털사이트에 게재된 주요 뉴스는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 10일 정도 뉴스를 훑어볼 여력도 없었다. 그사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당 대표가 ‘빠루’를 들고 사진을 찍었고, 국회의장은 야당 정치인의 뺨을 만지더니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한순간도 조용하지 않다. 삶에서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우리는 늘 선택한다. 한 분야 장인들은 그 분야에만 초점을 두고 나머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조정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의 시민이 이런 장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곤란할 것이다. 우리는 ‘공적인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대째 최고의 설렁탕을 만드는 장인이라도 세월호 참사 같은 사태가 터지면, 그 사태의 원인과 결과, 동료 시민의 부당하고 불행한 죽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처럼 공적으로 감시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장인은커녕 일정한 전문성을 위해 몰입할 시간도 내기 어렵다. 일상적인 권력 운용을 맡긴 정치인들이 늘 정치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수준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한국의 시민들은 자주 고민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사시험을 준비하고 자율주행 자동차를 연구하는 데만 몰입해도 괜찮을까?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감시로 지탱되므로, 우주공학자이든 이비인후과 전문의든, 설렁탕 장인이든 모두 일정한 공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상시적으로 공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권력을 맡겨놓은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정치권을 뜬눈으로 감시해야 한다. 이러면 더 좋은 설렁탕이나 인공위성을 만드는 데 방해를 받을 것인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개인의 인생 이야기는 공동체의 서사(역사)에 ‘과도하게’ 결부될 가능성이 있다. 정치공동체의 서사는 물론 개개인의 삶과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정치공동체의 역사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에서 결합할 때, 공동체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우리는 양보 없는 싸움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60~70대 정도의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체로 빈곤했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 어려운 시절 개별적인 삶의 의미를 담을 직업도, 여가의 영역도 거의 없었다. 이렇게 지나쳐온 인생에서 뒤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산업화와 반공이라는 역사 이야기만이 개인의 인생을 통합할 유일한 의미망이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간 어르신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선동당한 희생양이나 ‘꼰대들’이라고 취급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 정치는 공동체의 이야기(역사)를 두고 극한으로 대립한다. 다만 한쪽은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이 그저 그때그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 같기도 한데, ‘독재타도’를 외치면서도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념이 없는 이익투쟁을 펼치는 이들은 공동체에 해롭지만, 공동체의 이야기에 자기 삶을 깊이 결부시킨 사람들도 종종 해로울 수 있고 때로는 치명적이다. 민족의 해방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서사가, 80년대 통일운동을 위해 젊음을 바친 정치인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이야기 짓기는 늘 오류 가능성을 품으며, 특히 그동안의 이야기 전개에 비추어 미래를 예측하려다간 낭패를 본다. 세계는 정합적인 이야기대로 결코 전개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의미있는 이야기로 재해석할 따름이다. 공동체의 이야기가 불필요하다거나 그에 대한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오류가 더 적고, 분명 더 정의롭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공동체의 ‘이야기들’에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2019년 한국의 시민들 다수는 개개인의 고유한 이야기들이 있으며, 적당한 거리를 두되 민주주의에 필요한 관심은 여전히 폐기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칼럼 |
[공감세상] 이야기에서 ‘약간의’ 거리를 / 김원영 |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바빠도 포털사이트에 게재된 주요 뉴스는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 10일 정도 뉴스를 훑어볼 여력도 없었다. 그사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당 대표가 ‘빠루’를 들고 사진을 찍었고, 국회의장은 야당 정치인의 뺨을 만지더니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한순간도 조용하지 않다. 삶에서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우리는 늘 선택한다. 한 분야 장인들은 그 분야에만 초점을 두고 나머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조정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의 시민이 이런 장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곤란할 것이다. 우리는 ‘공적인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대째 최고의 설렁탕을 만드는 장인이라도 세월호 참사 같은 사태가 터지면, 그 사태의 원인과 결과, 동료 시민의 부당하고 불행한 죽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처럼 공적으로 감시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장인은커녕 일정한 전문성을 위해 몰입할 시간도 내기 어렵다. 일상적인 권력 운용을 맡긴 정치인들이 늘 정치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수준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한국의 시민들은 자주 고민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사시험을 준비하고 자율주행 자동차를 연구하는 데만 몰입해도 괜찮을까?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감시로 지탱되므로, 우주공학자이든 이비인후과 전문의든, 설렁탕 장인이든 모두 일정한 공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상시적으로 공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권력을 맡겨놓은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정치권을 뜬눈으로 감시해야 한다. 이러면 더 좋은 설렁탕이나 인공위성을 만드는 데 방해를 받을 것인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개인의 인생 이야기는 공동체의 서사(역사)에 ‘과도하게’ 결부될 가능성이 있다. 정치공동체의 서사는 물론 개개인의 삶과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정치공동체의 역사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에서 결합할 때, 공동체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우리는 양보 없는 싸움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60~70대 정도의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체로 빈곤했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 어려운 시절 개별적인 삶의 의미를 담을 직업도, 여가의 영역도 거의 없었다. 이렇게 지나쳐온 인생에서 뒤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산업화와 반공이라는 역사 이야기만이 개인의 인생을 통합할 유일한 의미망이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간 어르신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선동당한 희생양이나 ‘꼰대들’이라고 취급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 정치는 공동체의 이야기(역사)를 두고 극한으로 대립한다. 다만 한쪽은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이 그저 그때그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 같기도 한데, ‘독재타도’를 외치면서도 모순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념이 없는 이익투쟁을 펼치는 이들은 공동체에 해롭지만, 공동체의 이야기에 자기 삶을 깊이 결부시킨 사람들도 종종 해로울 수 있고 때로는 치명적이다. 민족의 해방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서사가, 80년대 통일운동을 위해 젊음을 바친 정치인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이야기 짓기는 늘 오류 가능성을 품으며, 특히 그동안의 이야기 전개에 비추어 미래를 예측하려다간 낭패를 본다. 세계는 정합적인 이야기대로 결코 전개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의미있는 이야기로 재해석할 따름이다. 공동체의 이야기가 불필요하다거나 그에 대한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오류가 더 적고, 분명 더 정의롭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공동체의 ‘이야기들’에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2019년 한국의 시민들 다수는 개개인의 고유한 이야기들이 있으며, 적당한 거리를 두되 민주주의에 필요한 관심은 여전히 폐기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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