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5 16:13
수정 : 2019.05.15 20:38
손아람
작가
처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했던 것은 꽤 오래전이다. 그때 나는 튜링 테스트에 도전하는 인공지능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인간에 가까운 ‘제정신’으로 조율하기 위해 언어의 본질을 파헤치던 컴퓨터 엔지니어가 스스로 정신적 혼란을 느껴 정신과 의사를 찾게 되는 이야기였다. 인공지능 이론을 참고할 전문 서적은 널렸지만, 정작 정신과 의사의 대사를 쓸 수가 없었다. 정신과 전문의가 환자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의사에게는 내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검색엔진용으로 사용될 자가학습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팀을 이끌고 있으며, 스물한살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말했다. 내 소설의 인물과 똑같이. 의사는 내 이야기에 금방 빠져들었다. 호기심이 묻어나는 그의 질문에 신이 나서 대답을 지어내다 보니 소설 속 설정과 실제의 내가 구분할 수 없도록 뒤섞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의사는 일주일치 약을 처방해주었다. 나를 과대망상으로 진단했다. 진단이 내 소설의 인물에 대한 것인지, 그를 만들어낸 나까지 간파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의 이론을 나보다 잘 다루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에게 고해성사처럼 비밀을 털어놓는 경험에서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뒤로 기분이 헤어날 수 없이 우울하거나, 마음을 다잡기 어렵도록 혼란스럽거나,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할 때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간다. 대체로 정신과 전문의들은 환자로 찾아온 작가에게 관심을 보인다. 다른 전문의에 비해 인문학적 소양이 깊고 독서를 많이 해서 그럴 것이다. 쓰던 글이 잘 풀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며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과를 찾았던 적이 있다. 진료실 회전의자에 앉아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탐독하던 의사는 책을 덮어두고 어떤 문제로 오셨나요, 라고 물었다. 김어준의 책이 거둔 엄청난 성공이 내 정신적 문제의 본질인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만난 정신과 전문의들은 하나같이 말수가 적었다. 그들은 주로 들었다. 진단서의 항목을 채우기 위해 구체적인 진단명을 적어 넣긴 했지만, 현대 정신의학의 과학적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위험성이 없는 약 처방으로 시작해서 경과를 지켜보며 범위를 좁혀가자는 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이었다.
언제나 내 문제는 천천히 나아졌다. 그 무엇도 단정하지 않는 신중함을 나는 신뢰했다. 위험하고 단정적인 언어는 정신의학의 전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의 정신적 수준을 얕잡아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버그 코드를 패치하거나 찌그러진 범퍼를 복원하듯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부류였다면, 차라리 편두통 탕약을 취급하는 한의원에 가서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다.
배우 유아인의 정신 상태를 트위터로 공개 진단했던 정신과 의사의 추가적인 엽기 행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여성 환자들에게 사적으로 접근해 성관계를 맺고, 추이 관찰 없이 6개월치 약을 한꺼번에 처방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 일부가 경력을 망칠까 봐 자신의 정신질환을 다른 의사에게 치료받지 못한 고위험군 환자라는, 정신과 전문의가 저널에 기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단박에 수긍이 갈 정도다.
나는 이 의사가 잘못된 의료행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를 의료과실을 저지른 정신과 전문의로 기억하고 있지 않듯이. 의사면허취소 심의가 의사면허취득 시험보다 까다롭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가 가진 의사면허의 영구적 박탈 소식을 간절하게 기다린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정신과 전문의도 신뢰할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백하고 성실하게 진료에 임해온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눈앞의 의사가 정신의학의 전문가인지 아니면 환자보다 치료가 시급한 위험인물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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