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동해 지역에는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실향민 정착촌이 있다. 전쟁 시기에 며칠간 피해 있으려고 ‘갯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함경도 사람들이 휴전되자 고향과 가까운 속초 바닷가 근처 허허벌판에 취락을 형성했다. 통일되면 바로 고향으로 올라가려 했기 때문이다. ‘아바이마을’은 ‘할아버지’ 또는 ‘어르신’을 일컫는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를 사용했던 데서 연유한다. 여러 휴가지 중에 내가 자주 가는 지역은 동해에 있는 속초와 삼척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속초는 북쪽에서 멀지 않은 남쪽의 동해안에 있고 그 아래 삼척은 고향 함경도의 정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북쪽에 고향을 둔 친구들과 속초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을 다녀온 뒤, 말투를 의심해 출신지를 묻는 물음에 너나없이 속초가 고향이라고 둘러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방인인지 아닌지에 따라 차별하는 눈초리를 피해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가 속초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속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구체적으로 속초 어디에 살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말문이 막혔으니 말이다. 부끄러움과 상심에 처한 우리를 보고 먼저 정착한 선배가 조언했다. 자기는 고향을 물어보면 속초가 아닌 삼척 출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속초보다 삼척에서는 아직도 ‘오리지널 함경도 억양’이 존재하며 특히 대부분은 삼척을 잘 모르기 때문에 깐깐하게 묻지 않는다고 했다. 삼척에 가보니 정말 그랬다. 많은 피난민이 그곳에 정착했고 상대적으로 왕래가 덜한 지역이어서 북쪽 특유의 농밀함도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부끄러움을 경험한 터라 삼척마저 고향으로 둔갑시킬 용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에겐 이런 사연이 있는 삼척의 방파제에 함경도에서 출발한 작은 목선 하나가 들어왔다. 탈북을 결심하고 바다로 나왔고 목숨을 걸고 700㎞ 이상의 거리를 항해하여 결국 살아남아 뭍으로 올라왔다. 차라리 평소와 같은 무관심이나 질퍽한 조롱 정도면 나을 뻔했다.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가 달라붙어 그들을 간첩으로 규정했고 합동조사를 통해 ‘탈북’으로 결론이 났어도 막무가내였다. 생사를 걸고 사람이 왔는데 춥고 무서운 바다에서 얼마나 고생했느냐는 한마디의 말 대신 사생결단으로 그들을 몰아세웠다. 간첩이든 조난을 당했든 탈북한 것이든 정부의 조사가 끝난 뒤 공격해도 무방할 텐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북쪽 출신이기 때문이다. 적군이 아니라면 ‘잠재적 적’이라는 네거티브의 명제가 먹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국민도 아니기에 이념 싸움의 희생자로 내세워도 된다는 전형적 ‘분단 장사’다. 북쪽 출신자도 인간일 텐데 그들의 존엄과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삼척항 사건의 약발이 떨어지자 늘 그랬듯 철저히 외면했다. 자유의 뭍에서 마주한 비인간성은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보다 나았을까. 잊을 만할 무렵에 목선 하나가 또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인 의사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앞선 목선을 간첩으로 몰아갔던 이들이 태도를 바꾸고 탈북하러 내려온 사람을 정부가 강제북송한다며 극단적 이중성을 보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속되는 아픔의 현장에서 분단을 빙자한 ‘주홍글씨 새기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짐작조차 할 수 있었을까? 검푸른 폭풍을 넘은 뒤에 기다린 것이 또 다른 사선과 배척의 시선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사를 받기도 전에 간첩으로 낙인찍힌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새 출발을 한들 우리 사회가 씌운 오명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처음 발을 내디뎠던, 억양도 구수하고 입맛도 그리운 동해 지역으로 다시 오고 싶을까. 피난과 실향의 역사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조차 올 수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모처럼 동해 지역에서 보내는 휴가가 그리 즐겁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칼럼 |
[공감세상] 삼척을 고향으로 대는 이유 / 주승현 |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동해 지역에는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실향민 정착촌이 있다. 전쟁 시기에 며칠간 피해 있으려고 ‘갯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함경도 사람들이 휴전되자 고향과 가까운 속초 바닷가 근처 허허벌판에 취락을 형성했다. 통일되면 바로 고향으로 올라가려 했기 때문이다. ‘아바이마을’은 ‘할아버지’ 또는 ‘어르신’을 일컫는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를 사용했던 데서 연유한다. 여러 휴가지 중에 내가 자주 가는 지역은 동해에 있는 속초와 삼척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속초는 북쪽에서 멀지 않은 남쪽의 동해안에 있고 그 아래 삼척은 고향 함경도의 정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북쪽에 고향을 둔 친구들과 속초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을 다녀온 뒤, 말투를 의심해 출신지를 묻는 물음에 너나없이 속초가 고향이라고 둘러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방인인지 아닌지에 따라 차별하는 눈초리를 피해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가 속초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속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구체적으로 속초 어디에 살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말문이 막혔으니 말이다. 부끄러움과 상심에 처한 우리를 보고 먼저 정착한 선배가 조언했다. 자기는 고향을 물어보면 속초가 아닌 삼척 출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속초보다 삼척에서는 아직도 ‘오리지널 함경도 억양’이 존재하며 특히 대부분은 삼척을 잘 모르기 때문에 깐깐하게 묻지 않는다고 했다. 삼척에 가보니 정말 그랬다. 많은 피난민이 그곳에 정착했고 상대적으로 왕래가 덜한 지역이어서 북쪽 특유의 농밀함도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부끄러움을 경험한 터라 삼척마저 고향으로 둔갑시킬 용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에겐 이런 사연이 있는 삼척의 방파제에 함경도에서 출발한 작은 목선 하나가 들어왔다. 탈북을 결심하고 바다로 나왔고 목숨을 걸고 700㎞ 이상의 거리를 항해하여 결국 살아남아 뭍으로 올라왔다. 차라리 평소와 같은 무관심이나 질퍽한 조롱 정도면 나을 뻔했다.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가 달라붙어 그들을 간첩으로 규정했고 합동조사를 통해 ‘탈북’으로 결론이 났어도 막무가내였다. 생사를 걸고 사람이 왔는데 춥고 무서운 바다에서 얼마나 고생했느냐는 한마디의 말 대신 사생결단으로 그들을 몰아세웠다. 간첩이든 조난을 당했든 탈북한 것이든 정부의 조사가 끝난 뒤 공격해도 무방할 텐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북쪽 출신이기 때문이다. 적군이 아니라면 ‘잠재적 적’이라는 네거티브의 명제가 먹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국민도 아니기에 이념 싸움의 희생자로 내세워도 된다는 전형적 ‘분단 장사’다. 북쪽 출신자도 인간일 텐데 그들의 존엄과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삼척항 사건의 약발이 떨어지자 늘 그랬듯 철저히 외면했다. 자유의 뭍에서 마주한 비인간성은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보다 나았을까. 잊을 만할 무렵에 목선 하나가 또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인 의사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앞선 목선을 간첩으로 몰아갔던 이들이 태도를 바꾸고 탈북하러 내려온 사람을 정부가 강제북송한다며 극단적 이중성을 보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속되는 아픔의 현장에서 분단을 빙자한 ‘주홍글씨 새기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짐작조차 할 수 있었을까? 검푸른 폭풍을 넘은 뒤에 기다린 것이 또 다른 사선과 배척의 시선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사를 받기도 전에 간첩으로 낙인찍힌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새 출발을 한들 우리 사회가 씌운 오명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처음 발을 내디뎠던, 억양도 구수하고 입맛도 그리운 동해 지역으로 다시 오고 싶을까. 피난과 실향의 역사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조차 올 수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모처럼 동해 지역에서 보내는 휴가가 그리 즐겁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