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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7 17:49 수정 : 2019.08.27 18:56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일본의 반도체 핵심 3개 부품 무역규제 조치로 반도체 강국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핵심 소재·부품 국산화는 오래전부터 조금씩 추진되었지만,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핵심 중간 소재 수출을 규제하면 한국의 주력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우리는 세계화, 자유무역 찬가를 지난 20여년 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분업 질서에서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는 이제 구시대의 의제라고까지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재인 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제조업 르네상스를 내걸었으나 일본의 무역규제가 있기 전에는 소재·부품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거시 산업경제정책을 세운 것 같지도 않다. 대기업들은 소재·부품 생산 중소기업 지원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했고, 이들과 불공정한 전속계약 상태에 있었던 한국 중소기업은 독자 기술 개발을 거의 포기했다.

그래도 정부가 1조원의 예산을 긴급 편성하여 핵심소재 생산에 집중 지원하려 하고 일부 기업도 ‘소재 강국 선언’을 한 것은 바람직한 조치다. 그런데 이 분야를 잘 아는 한 전직 기업 간부는 우리가 수조원, 수십조원 쏟아부어 부품·소재 국산화를 할 수 있었다면 왜 안 했겠느냐고 말한다. 삼성 반도체에 오래 근무한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고 수준의 소재 개발은 기술보다는 ‘과학’의 영역이며, 정부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전문가들은 제조업 분야의 원천기술 확보는 오랜 ‘축적의 시간’을 필요로 하며, 산업 생태계 조성, 시스템 구축, 연구지원 등 정부의 지속적인 정책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본다.

케이팝, 한류 등 문화 산업에서 한국 청년들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한국의 여러 대기업의 상품이 세계의 전자제품 시장에서 일본의 유수 기업을 제친 일은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본의 무역 공격은 추격 발전의 성공담에 취해 있던 한국에 확실하게 한 방을 먹였고, 자유무역의 패러다임이 바뀐 오늘날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국가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었다.

핵심 원천기술은 수입해서 쓰기 어렵다. 그것은 그 기초과학과 과학자, 그리고 고숙련 기술자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중국이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과학자들을 거액 연봉으로 유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는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를 부추기고 있지만, 세계화의 전도사인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도 미국은 가장 많은 예산을 자국 기업과 농업 보호에 쏟아부었다. 순진한 한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나 설익은 이론으로 산업정책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닐까? 이제 자유무역이 빛이 바랬다고 말들 하지만, 사실 완전한 자유무역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당장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 원천기술 개발과 그 기반인 기초과학 육성은 정부와 대학의 몫이다. 이번의 일본 무역규제 조치 직후 카이스트 교수 100명이 반도체, 에너지 등 원천기술 개발 지원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은 매우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이 원천기술 축적에 투자되지 않고, 우수한 젊은이들이 기초과학 분야가 아닌 의과대학으로만 몰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구제국주의 국가들이 여전히 세계 가치사슬의 정점에 서서 원천기술을 독점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내 전공인 인문사회과학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대학들은 원천이론 생산 능력이 없는 수입중개소다. 한국이 세계 누구도 하루아침에 베껴갈 수 없는 원천지식을 생산해야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지식 ‘상품’을 팔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과 인류가 처한 문제에 기여할 수 있다. 풍부한 역사적 유산과 인문사회과학적 자원을 원천지식 생산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등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기업-중소기업의 산업 생태계만 재구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교육·연구 생태계도 개혁해야 한다.

일본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우리 것’이 무엇인지, 시스템이 어떻게 뒤틀려 있는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구환경·에너지·식량 위기에 대처하는 인류의 대열에 서기 위해서도 원천기술과 기초이론의 축적은 필요하다. 핵심기술과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오랜 정부 지원과 교육개혁을 필요로 한다. 이번 일본의 무역규제가 한국 정부, 대학, 기업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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