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17 19:16
수정 : 2016.06.17 19:19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에시오 트롯: 거북아, 거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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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오 트롯: 거북아, 거북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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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오 트롯: 거북아, 거북아>
호피는 내성적인 성격의 독신남이다. 작은 체구의 그는 아주 소량의 식사를 하고, 최소한의 가구를 갖춘 집에서 조용하게 살아간다. 유일하게 열정을 바쳐 가꾸는 발코니 정원의 꽃처럼 지극히 차분한 정물의 삶이 호피의 인생이다. 그런 호피가 아래층에 이사 온 라비니아 실버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와는 정반대로 발랄하고 활동적인 그녀가 같은 아파트의 또다른 독신남까지 사로잡자, 호피는 용기를 내어 숨겨둔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에시오 트롯: 거북아, 거북아>(이하 <에시오 트롯>)는 전형적인 로맨스물이다.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남녀의 사랑은 몇 번의 오해를 거치며 위기를 맞지만 결국 난관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이 진부한 연애담의 주인공이 인생 황혼기의 노년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70대 노인인 호피의 짝사랑은 “이대로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영원히 혼자여야 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수반하기에 한층 더 절실해지고, 동년배인 실버의 쾌활함 역시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삶을 최대한 즐기려는 태도에서 기인하기에 치열해진다. 노년이기에, 그들의 사랑은 그 어떤 청춘로맨스보다 밀도 높은 활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여느 청춘로맨스와 다르지 않게 풋풋하고 서툰 연애담이기도 하다. 호피의 고백 프로젝트는 실버의 입장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위기에 처하고, 적극적이고 대담한 실버는 막상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소심해진다. 노년의 로맨스라 해서 특별히 성숙한 ‘완성형’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미숙한 연애담으로 그린다는 데 이 작품의 진정한 사랑스러움이 있다. 원작자인 로알드 달이 동화작가로도 유명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더 설득력 있는 시선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평생토록 성장해야 하는 존재다.
각색가인 리처드 커티스의 색깔도 강하게 느껴진다. 그의 대표작인 <러브 액츄얼리>에 하나의 삽화로 끼워 넣는다 해도 잘 어울릴 낭만적인 사랑 찬가이기 때문이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낯익은 배우들의 신선한 표정을 발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것처럼, <에시오 트롯>에서도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전설적인 명배우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주연으로 만나기 힘들어진 더스틴 호프먼과 주디 덴치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표정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체험이다.
요즘 국내에서도 노년의 명배우들이 대거 등장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가 화제다. 여전히 미숙하고 생에 대한 호기심이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물들을 통해 노년 묘사의 전형성을 허무는 드라마의 세계는 <에시오 트롯>을 자주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겐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작품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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