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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2 19:16 수정 : 2019.08.02 19:20

국내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문화방송>(MBC) 누리집 갈무리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방캉스족’을 위한 추천리스트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달 푸른 해’
아동심리상담사의 연쇄살인 추적기
오컬트스릴러 ‘손 the guest’
‘한반도 토착귀신’ 공포를 활용

뮤지컬 ‘크레이지 엑스걸프렌드’
실수만 하는 여주인공의 행복찾기
에미상 19개 부문 후보 ‘체르노빌’
올해 HBO 최고작품으로 꼽혀

국내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문화방송>(MBC) 누리집 갈무리
성수기 인파와 바가지요금을 피해 집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보내는 ‘방캉스족’(방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 이들의 알찬 휴가를 위한 추천작들이 있다. 더위를 시원하게 날릴 만한 재미와 완성도, 그리고 사회적 의미까지 두루 갖춘 국내외 수작 드라마 네 편을 엄선해 소개한다.

슬프고 아름다운 <붉은 달 푸른 해>(MBC)

아동심리상담사 차우경(김선아)은 운전 중 비극적 사고에 휘말린 뒤부터 이상한 환영을 본다. 꿈인지, 환각인지, 우경의 눈앞에만 나타나는 녹색 옷을 입은 아이는 그녀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아이의 흔적을 따라가던 우경은 곧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과 마주치고 그 배후에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를 접하게 된다. <붉은 달 푸른 해>는 기이한 사건을 맞닥뜨린 한 여자가 그를 둘러싼 어두운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한국 장르드라마의 주류로 자리 잡은 미스터리 범죄스릴러에 속하는데, 이 장르의 전형적인 공식을 비켜 가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잔인한 살인 장면이 아니라 한 아이의 자해 장면으로 이야기의 문을 열고, 경찰이나 검사가 아닌 아동상담사가 진실의 추적자로 나선다.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되는 닉네임 ‘붉은 울음’이 누구인가를 추리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범인의 정체보다 사건의 근본적 동기에 맞춰져 있다. 그 추적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방임당하고 학대당하는 아이들에 관한 거대한 슬픔과 분노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제일 잔혹한 폭력에 내몰리는 불가해한 세상에 대한 의문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미스터리이고, 아이들에게는 “온 세상이자 우주”와도 같은 부모들이 그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의 가장 큰 공포다. <문화방송>(MBC) <베스트극장-늪>, <에스비에스>(SBS)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등 웰메이드 스릴러를 선보여왔던 도현정 작가는 한층 원숙해진 필치로 올해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를 전면에서 이끌어간 주연 배우 김선아, 짧은 비중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 김여진, ‘개장수’ 역으로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 백현진까지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국내 드라마 <손 더 게스트(the guest)>. <오시엔>(OCN) 누리집 갈무리
시즌2 기다려지는 <손 더 게스트(the guest)>(OCN)

동쪽 해안의 작은 마을 계양진에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난다. 마을 이장의 어린 손자가 귀신에 씌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아이를 구마 하러 왔던 젊은 부사제는 악령에 휘둘려 가족을 살해한다. 20년 뒤, 그 잔혹한 비극에 얽혔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다시 모인다. 귀신을 보는 택시기사 윤화평(김동욱), 구마 사제 최윤(김재욱), 강력계 형사 강길영(정은채) 등 주인공 삼인방은 과거의 악령과 맞서 싸우기 위해 힘을 합친다. 지난해 방영된 <손 더 게스트>는 최근 몇년 사이 국내 장르물의 새로운 트렌드로 급부상한 오컬트 스릴러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들과 대결을 펼치는 ‘메인 빌런’의 존재부터가 색다르다. 오컬트 스릴러 열풍의 시발점이 된 영화 <검은 사제들>을 비롯해 이 장르에 속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서구의 유서 깊은 악마와 싸우는 것과 달리, <손 더 게스트>는 한반도의 토착 귀신을 공포의 근원으로 삼는다. 악령의 이름도 극히 평범한 ‘박일도’다.

<손 더 게스트>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악에 대한 상상력에 있다. 드라마를 향한 주된 관심은 과연 박일도가 빙의한 범인이 누구인가에 쏠려 있었지만, 사실 박일도는 그저 악령의 무수한 이름 중 하나였을 뿐이다. 박일도의 유래가 친일파 집안 출신이라는 근현대사 속 비극에 있었던 것처럼 <손 더 게스트>의 귀신은 그 시대의 상징적 악을 파고든다는 데에서 진정한 공포를 자아낸다. 가령 주인공들이 21세기의 서울에서 다시 맞닥뜨린 박일도는 약자들의 슬픔과 사회의 방관에 뿌리를 내린 귀신이었다.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싱글맘의 어린 자녀, 부모에게 학대당한 기억을 품고 자란 인물 등이 사악한 귀신의 공격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들을 구마 하는 의식은 악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넘어 서글픈 여운을 자아낸다. 팬들이 계속해서 시즌2를 기다리는 이유다.

미국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걸프렌드>. 아이엠디비(IMDb) 누리집 갈무리
여성의 실패 응원하는 <크레이지 엑스걸프렌드>(CWTV)

미국 뉴욕의 잘나가는 변호사 리베카 번치(레이철 블룸)는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갑자기 불안에 빠진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고민하던 리베카 앞에 첫사랑 조시(빈센트 로드리게스 3세)가 운명처럼 나타나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난 사랑에 빠졌어요”라는 노래가 스쳐 지나간다. 회사의 제안을 거절한 리베카는 뉴욕의 삶을 청산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정확하게는 조시의 뒤를 좇아 그가 사는 웨스트코비나로 이사한다. <크레이지 엑스걸프렌드>는 시작한 지 10분 만에 유능하고 똑똑한 여성이 성공의 정점에서 끔찍하도록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끔찍한 것은 이런 선택이 거의 시리즈 내내 이어진다는 점이다. 스토킹에, 양다리에, 거짓말에, 레베카의 ‘이상 행각’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탁월한 성취가 있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실수를 거듭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또 있었던가. 조금만 실수를 저질러도 ‘민폐 여주’로 낙인찍혀 ‘욕받이’가 되곤 했던 수많은 여주인공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리베카의 끊임없는 시행착오는 오히려 의도적인 퍼포먼스로 다가온다. 시즌3에 가면 리베카가 실제로 ‘경계성 인격장애’(정서·행동·대인관계 불안정)를 지닌 ‘미친’ 인물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리베카는 전문가의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해야만 가까스로 성장과 치유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럼에도 리베카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고, 드라마는 답을 얻기까지 무수히 반복하는 여성의 좌절과 실패를 관대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한다. 정신질환을 소재로 하지만 마냥 어둡고 무거운 작품은 아니다. 로맨스 속 ‘걸프렌드’의 모든 판타지를 깨기 위해 태어난 리베카 캐릭터를 포함해 개성적인 주변 인물들이 계속해서 웃음을 이끌어내고, 참신한 뮤지컬 신의 재미가 어우러져 회당 40분이 후딱 지나간다. 인기 삽입곡들의 라이브 콘서트 무대로 펼쳐진 마지막 시즌의 스페셜 에피소드도 놓쳐선 안 된다.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 아이엠디비(IMDb) 누리집 갈무리
논픽션 드라마의 정석 <체르노빌>(HBO)

다음달 개최되는 제71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많은 이목이 쏠리게 될 작품은 단연 역대 최다 부문 후보 기록을 세운 <왕좌의 게임>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비평가와 대중 사이에서 올해 최고의 <에이치비오>(HBO) 드라마로 손꼽히는 작품은 대서사시 <왕좌의 게임>이 아닌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이다. 세계 최대의 영화·드라마 정보 사이트 아이엠디비(IMDb)에서 역대 티브이 시리즈 랭킹 최고 평점을 기록한 <체르노빌>은 에미상에서도 19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1986년 4월26일 오전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룬 이 작품은 재난 이후의 긴박한 상황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사고 지대에서부터 서서히 퍼져가는 방사능 재가 시청자들의 머리 위에도 내려앉는 느낌이 들 정도다.

<체르노빌>에 쏟아지는 무수한 찬사와 호평의 이유는 단순히 ‘잘 만든 드라마’라는 데에만 있지 않다. <체르노빌>은 흔한 스펙터클이나 감상적인 휴머니즘 등의 극적인 요소로 재난물의 쾌감을 전하려 하는 대신 이 비극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우리 현실을 환기하게 만드는 논픽션 드라마의 윤리에 충실하다. 설계 결함과 조작 실수 등 재난의 직접적 원인뿐 아니라 참상을 확대한 옛소련의 관료주의, 그리고 더 근본적인 배경이 된 핵 경쟁 시대의 정세까지, 이 비극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총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단순한 슬픔 이상의 감정을 이끌어내고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체르노빌>의 진짜 힘이다. 보다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국내 한빛원전 격납 건물의 공극(구멍) 발생 등 현존하는 위협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당장 시급한 질문부터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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