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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14 18:38 수정 : 2017.06.14 20:49

전우용
역사학자

1960년 4월11일,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꽃다운 생명이 참혹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슬픔과 분노가 밀려들어 체념과 두려움을 몰아냈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이 학교 2학년 학생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가 정신을 잃은 채 동료의 품에 안겨 피를 흘리는 모습은 그해 초 박종철 고문 살인 이후 불타오르던 시민들의 분노에 다시 한 번 기름을 끼얹었다.

1920년대에 영국 화학자들은 클로로벤질리딘 말로노니트릴이라는 화학물질에 눈물샘을 자극하고 호흡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무리 나쁜 효능이라도 이용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생리다. 민간인을 상대하는 무기로 최루탄이 발명된 것은 1930년께였고, 이때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규모 시위 진압에 으레 이 물건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 6월 미군이 거제도 포로수용소 포로들에게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6월, 한국 경찰은 간첩과 공비 소탕 대책의 일환으로 최루탄 수입을 검토했고, 3·15 부정선거 한 달 전에는 대대적인 최루탄 사용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최루탄으로 인한 첫 사망자는 어린 학생이었다.

최루탄의 국내 생산은 1975년부터 개시되었는데, 이로부터 10년 만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독한 최루탄을 가장 많이 만들어 사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사이에 최루탄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최루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금지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최루탄 사용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연인원 1600만 명이 모였으나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기적적인 대규모 시위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졌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세계 민주화운동사에 짙게 밴 최루탄 냄새를 털어내는 데에도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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