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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06 18:28 수정 : 2017.09.06 20:02

전우용
역사학자

‘금강산 중노릇’이라는 옛말이 있었다. 명산에서 속세와 연을 끊고 사는 신선놀음이란 뜻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라는 뜻이었다. 강원도 관찰사가 잔치를 벌일 때는 종종 벗들을 불러 모아 금강산 유람에 나서곤 했다. 이 고관 일행은 산에 오를 때도 제 발로 걷지 않았는데, 평범한 가마꾼들에게 자기 생명과 안전을 맡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산길에 익숙한 중들을 징발하여 임시 가마꾼으로 삼았다. 하지만 금강산은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산이었다.

옛사람들에게, 특히 한국인들에게, 산은 하늘과 맞닿은 신성한 자연물이었다. 애국가에는 두 곳의 산이 나오며, 한국인 중에 어느 ‘산의 정기’와 무관한 학교에 다닌 사람은 거의 없다. 귀신도 물에 살면 그냥 ‘물귀신’이지만 산에 살면 ‘산신령’으로 승격된다. 신성한 산의 정수리를, 돈이나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맹수와 맞닥뜨릴 각오를 하고 일부러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말이 생긴 건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의 후원 아래 ‘전인미답’의 장소들을 찾아 첫발을 딛는 탐험가들이 출현한 뒤였다. 누가 처음 밟은 땅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도 인간의 생리다. 1871년 미국의 앤드루 스미스 핼리디는 고도차가 심한 두 지점을 강철 밧줄로 연결한 뒤 서양식 가마를 매달아 운행시키는 방법을 개발해 특허를 취득했다. 이 케이블카는 곧 탐험가가 본 경관을 힘들이지 않고 제 눈으로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결합하여 산악 관광용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는 1961년 군사정권으로부터 무기한 독점권을 얻은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이듬해 5월12일에 개통한 남산 케이블카다. 현재 케이블카를 둘러싸고는 이로 인해 경관이 나빠지고 환경이 파괴된다는 주장과, 장애인과 노약자에게도 산에 오를 권리가 있으며 사람의 발이 자연을 더 심하게 해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어쨌거나 현대인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내면화한 사람들이며, 케이블카는 그 욕망을 표현하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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