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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2 18:19 수정 : 2017.11.22 20:06

전우용
역사학자

1946년 7월10일, 해방 후 첫 번째 대학 입학시험이 실시되었다. 연례대로라면 2월에 치러야 했으나 사회 전반이 혼란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학사운영은 불가능했다. 일제강점기 대학에는 한국인 교수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교수진을 새로 꾸려야 했고 여기에 학제 개편, 관립 대학과 전문학교를 통합하는 국립대학 설립안, 사립 전문학교들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안 등의 현안이 산적해 있어 신입생 모집은 한 학기를 건너뛰어야 했다.

입시 요강이 발표되자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국어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한국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무리이니 입시 과목에서 빼달라고 요구했으나, ‘조국보다 시험을 앞세운다’는 따가운 비난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도 명분이었지만, 일단 수적으로 압도적 열세였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유일의 대학이던 경성대학의 경우 1945학년도 입학생 총수는 267명, 이 중 20% 정도만이 조선인이었다. 1946년에는 많은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학교였다.

6·25전쟁 이후 신분제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하고 대학 교육의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자, 땅을 팔아서라도 자식 하나는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 전반을 뒤덮었다. 1969년, 양적 팽창에 따른 대학 교육의 질적 저하를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대입 예비고사가 처음 시행되었다. 이로써 모든 대입 지망자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시험의 배점기준은 학생 개개인의 소질이나 적성과는 무관하게 학습시간 배분표 구실도 했다.

대입 예비고사는 1982년 학력고사로,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었고, 대입에서 점하는 비중도 여러 차례 달라졌으나 이 시험 성적이 인생에서 점하는 비중은 줄어들지 않았다. 현대의 한국인은 수능시험 잘 치기 위해 유소년기를 보내고, 제 자식 수능시험에 속 끓이며 중장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수능시험지는, 현대 한국인의 평생을 좌우하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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