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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6 16:23 수정 : 2019.03.27 12:01

8일 오전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한 동산에서 가을에 꽃을 피우는 벚나무인 춘추화가 만개한 길을 한 시민이 걷고 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벚꽃을 피우는 춘추화는 가을에는 낙엽이 질 때 두 달가량 꽃을 피운다. 광주/연합뉴스

1990년, 서울시는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과 해방, 전쟁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훼손된 남산의 경관을 일제강점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계획이었다. 남산에 있던 외인아파트를 폭파철거하고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한 부지에 한옥마을을 조성하며 그 안에 서울 600년 타임캡슐을 묻는 일 등이 대표 사업이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과거 일본인들이 조선신궁 참배로 주변에 심어놓은 수백그루의 벚나무를 베어버리자는 제안이 나왔다. 서울시는 심각한 논의 끝에 벚나무를 베는 대신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가사에 어울리도록 소나무를 많이 심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9년 전인 1981년, 정부는 일제가 공원으로 만들어버린 창경궁을 ‘복원’하기로 하고 경내에 있던 벚나무들을 과천 서울대공원과 여의도 윤중제에 옮겨 심었다. 1983년을 마지막으로 70여년간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 봄놀이였던 ‘창경원 밤 벚꽃놀이’가 사라졌다.

많은 한국인의 오해와는 달리,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가 아니다. 절대다수 일본인이 덴노가(天皇家)의 상징인 국화(菊花)와 별도로 벚꽃을 ‘일본 민족성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덴노를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체제가 수립된 메이지 유신 무렵,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벚꽃에서 새 체제가 요구하는 신민(臣民)의 덕목을 발견했다. 일본 민족은 한꺼번에 아름답게 피었다가 한꺼번에 흩날리며 지는 벚꽃처럼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담론이 급속히 확산했다. 전쟁터에서 맞은 일본 병사들의 죽음은 벚꽃처럼 흩어진다는 뜻의 ‘산화’(散花)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도 스며들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한반도 산야에 수많은 벚나무를 심었다. 모든 공원이 봄이면 ‘사쿠라색’으로 물들었다. 벚나무는 미국산 아까시나무와 더불어 한국의 자연경관을 바꾼 대표적 수종이다. 근래엔 한국에서도 봄마다 전국 곳곳이 벚꽃놀이 인파로 붐빈다. 그러면서도 일본산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굳이 확인해야 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벚꽃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하지만 나무와 꽃에 무슨 이념이나 민족성이 있겠는가?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을 뿐.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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