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30 16:03
수정 : 2019.05.07 17:51
산에서 약초 캐는 사람을 순우리말로 심마니라고 하는데, 심은 산삼이라는 뜻이다. 그는 오직 산삼을 발견했을 때만 “심봤다”라고 세번 외친다. 호랑이가 백수(百獸)의 왕이듯, 산삼은 백약(百藥)의 왕이다. 약성(藥性)이 뛰어난데다 생김새까지 사람을 닮은 산삼은 오랫동안 신비의 영약으로 대접받았다.
삼(蔘)은 동북아시아 전역에 자생하지만, 옛날부터 한반도에서 나는 삼의 효능이 특히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삼은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삼의 가치가 높았던 만큼 이를 재배해보려는 사람도 많았을 터이나, ‘신비의 영약’을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려 말에 이르러 인공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기르기가 까다로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삼을 안정적으로 대량 재배하는 방법이 개발된 것은 1724년, 개성 사람 박유철 등에 의해서였다.
17세기까지 동아시아 무역에서 국제화폐 구실을 한 것은 은이었다. 조선은 일본에 면포, 쌀, 자기 등을 수출하고 은을 수입했으며 그 은으로 중국 물품을 사들였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 사이에 직교역이 확대되자 일본산 은의 수입이 줄어들었다. 조선 상인들에게 은을 대체할 결제수단 확보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중국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은보다 중량 대비 가치가 높고 장기 보관이 가능한 물건을 찾아야 했다. 이것이 상업 도시 개성에서 새로운 삼 재배법이 창안되고 홍삼 제조가 급증한 배경이다.
1797년, 정조는 홍삼 수출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반포했다. 홍삼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정부가 홍삼 수출을 통제함으로써 얻는 재정 수입도 막대했다. 개항 이후 무역이 급속히 늘어나자 정부는 홍삼을 전매(專賣) 물품으로 삼았다. 1894년 탁지부 산하에 종삼공사(種蔘公司)가, 1899년에는 내장원 산하에 삼정사(蔘政社)가 설립되었다. 일제도 홍삼을 담배와 함께 조선총독부 전매국에서 독점 취급하도록 했다. 홍삼이 정부 전매품에서 벗어난 것은 1989년 전매청 폐지 이후였다. 홍삼을 민간에서 자유롭게 제조 판매할 수 있게 되자 홍삼을 향한 대중의 열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오늘날 홍삼은 한국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건강식품’이긴 하나, ‘신비의 영약’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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