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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09 17:19 수정 : 2019.07.10 09:31

전우용
역사학자

1960년 8월12일 제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다음달 6일 일본 외무상 고사카 젠타로가 축하 사절로 서울에 왔다. 이튿날 한 신문은 고사카의 방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항에 일본기는 게양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양국 외상이 탄 승용차 양켠에 두 나라 국기를 꽂고 나부끼며 서울 시내로 들어올 때 연도에 나섰던 수많은 시민은 처음으로 대하는 한쌍의 태극기와 일본기를 관심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장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태극기와 일장기가 ‘한쌍’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을사늑약 이후 경술국치까지 태극기와 일장기는 주로 한쌍이었다. 그 시절 태극기 옆의 일장기는 ‘보호국으로 전락한 한국’ 또는 ‘곧 일본에 병합될 한국’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일장기는 한국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학살과 학대의 상징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도, 의병전쟁 때에도, 경신참변 때에도, 관동대학살 때에도, 한국인들이 대량학살당한 곳에는 늘 일장기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한국인 학병, 징용노동자, 근로정신대, 종군위안부가 도착지에서 처음 본 것도 일장기였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일장기에 충성의 뜻을 표해야 했다. 1939년,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일장기 게양대 앞까지 가서 숨을 거뒀다는 ‘애국노인 이원하’ 이야기는 한국인 모두가 본받아야 할 미담으로 유포되었다. 이어 수많은 한국인이 제 손가락을 잘라 혈염기(血染旗=피로 그린 일장기)를 만들어 일본 군대에 보냈다. 일장기는 ‘충량한 황국신민’의 상징이기도 했다.

1965년 한-일 협정 직후, 인사동의 한 골동품 상인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만세’라는 글귀를 새긴 광고물을 만들어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뿌렸다. 해방 20년밖에 안 된 때였으니,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구실 아래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희생됐는지 알면서도 한 일이었다. 그에게 일장기는 돈이었다.

국교 재개 이후 일장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지만,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있을 때면 그에 항의하여 일장기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의 일장기는 ‘애국심 과시’의 수단이었다. 일장기는 한국인들의 원한, 분노, 질시, 동경, 탐욕 등 온갖 감정이 누적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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