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8.20 17:53 수정 : 2019.08.21 09:20

전우용
역사학자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일본인들은 조선 내 개항장 안에 집을 짓고 상시 거주할 권리를 얻었다. 1877년 부산에 처음 설정된 개항장은 계속 늘었고, 급기야는 한반도 전역이 일본인에게 제한 없이 개방됐다. 일본인들은 일단 한국인 집을 사거나 빌려서 거주하다가 이윽고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순 일본식으로 지었으나 한반도에서 판유리가 생산된 뒤에는 일부 공간을 유럽식으로 꾸몄다. 일본인들은 이런 집을 ‘화양(和洋) 절충형 가옥’이라고 불렀는데, ‘화’(和)의 핵심은 다다미(疊)방이었다.

한국 거주 일본인들이 자기 집에 유럽식 요소를 끌어들일 무렵, 한국인의 도시 가옥도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 역시 한옥의 구들 구조에 유럽식 요소를 일부 끌어들였다. 그러나 일본식은 끌어들이지 않았다. 구들을 없애고 벽난로를 설치할지언정, 제집에 다다미방을 만든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다른 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식민 모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식민 권력에 잘 보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없는 한 일본식을 모방하지 않았다. 한국인 절대다수에게, 일본식은 본받을 가치가 없었다.

다다미방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급증한 것은 오히려 해방 이후였다. 일본인이 살았던 이른바 ‘적산가옥’은 서울에만 4만채에 이르렀으니, 해방 직후에는 20만명 넘는 서울 시민이 다다미방에 거주했던 셈이다. 적산가옥이 많이 남았던 서울 중구에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다다미 제조·수선 업체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전통양식의 가옥을 한옥, 유럽식 가옥을 양옥이라 부르면서도 다다미방을 갖춘 집들은 일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식 가옥 또는 일식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차별 의식을 표현했다.

오래전 학술회의 석상에서 건축사학자에게 물었다. “1880년대에 지어진 양옥은 근대건축이라 하고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은 전통건축이라 하셨는데, 근대는 시대입니까, 양식(樣式)입니까?” 그는 구조와 형태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건축사학의 특성상 근대는 양식으로 본다고 답했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은 전통건축입니까, 근대건축입니까?” 그는 향후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했다. 다다미는, 한국이 겪은 근대가 다른 식민지들이 겪은 근대와 달랐음을 알려주는 대표적 물건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