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08 17:28
수정 : 2007.05.0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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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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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칼럼
(1)이념정당의 뿌리가 깊은 유럽 나라들은 정권교체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난 수십년을 살펴보면 영국·독일형과 프랑스·스페인형이 뚜렷이 구분된다.
패턴이 가장 분명한 나라는 영국이다. 1951~64년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뒤 79년까지 15년 동안 노동당이 집권했다. 이후 보수당 정권이 97년까지 계속된 다음 노동당 정권이 1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10~20년을 주기로 우-좌-우-좌 정권이 교대한 것이다. 독일도 비슷하다. 기민련(49~69년)-사민당(~82년)-기민련(~98년)-사민당(~2005년) 등 집권당의 이념성향과 정권교체 시기까지 거의 같다. 독일에서 2005년 기민련 총리가 취임하고 영국 보수당이 다시 집권을 노리는 추세도 닮았다. 프랑스는 시기마다 집권당의 이념성향이 영·독과 거의 정반대였다. 58년 제5공화국 시작 이래 81년까지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가 이후 95년까지 14년 동안 좌파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어 지금까지 우파가 대통령으로 있다. 인접한 스페인에서도 프랑코 장기독재에 이어 우파(77~82년)-좌파(~96년)-우파(~04년) 정권이 교대했다.
이런 패턴이 나타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다. 앵글로색슨 나라인 미국과 영국은 경제·사회 정책과 대외관계에서 거의 한몸처럼 움직인다. 여기에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가세해 미-영-독 정치 동조구조가 만들어졌다. 반면, 프랑스는 샤를 드골 시대부터 ‘강한 프랑스’를 추구해 왔다. 좌·우 정권을 막론하고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에 기꺼이 맞선다는 사회적 합의에 충실했다. 프랑스는 그럼으로써 대륙 유럽의 중심국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이 유럽의 이런 구도를 뒤바꿀 조짐을 보인다. 스페인에선 2004년 좌파 정권이 다시 등장했으나 프랑스에선 우파가 이겼다. 미-영-독 동조구조가 프랑스까지 확장되는 초기 국면인가?
(2)승리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중운동연합 후보는 프랑스 정계에서 보기 드문 미국 숭배자다. 그는 미국처럼 재산세·상속세를 내리고 노동 유연성을 높일 것을 주장한다. 복지 축소도 그의 주요 공약이다. 주35시간 노동제에는 물론 반대한다. 마치 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보는 것 같다. 이민자 통제 강화를 내세우고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하는 등 공격적 민족주의 성향도 일치한다.
미국은 당연히 사르코지를 환영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는 역사적 동맹”이라며 ‘강력한 동맹’을 기대했다. 공화당만이 아니다.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사르코지 쪽과는 만났으나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는 피했다. 역시 대선 예비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도 같은 여성인 루아얄과 거리를 뒀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측근과 사르코지 참모들이 왕래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쪽 역시 사르코지를 은근히 지원했다.
프랑스는 지금 변화가 절실한 시점에 있다. 실업률은 높고 국가부채는 늘어난다. 청년층과 이민자·실업자 등의 불만은 갈수록 커진다. 전통적 이념정치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투표율이 84%나 된 것은 참여민주주의의 승리라기보다 국민들의 불안과 기대를 반영한다. 하지만 선택의 폭은 좁았다. 사회당이 새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자리에 시장의 힘,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사르코지가 밀고들어왔다. 그가 말하는 ‘프랑스의 미국화’는 잘 짜인 구상이라기보다 불안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충격요법의 성격이 강하다. 그의 당선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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