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1 21:56
수정 : 2009.07.2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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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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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에 걸린 사람은 대개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는 부정이다. 진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단계다. 둘째는 분노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부당하다고 여긴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다음은 타협(협상)이다. 현실을 조건부로 인정하고 상황 개선을 위해 다양하게 시도한다. 넷째는 좌절이다. 노력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심한 상실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진다. 마지막은 수용이다. 최악의 상황까지 감수할 준비를 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마음가짐이 병을 호전시키기도 한다.
이런 단계들은 갑작스런 생활환경 변화로 겪는 문화충격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을 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나 부정과 분노 단계를 잘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현실을 객관화하고 목표와 방법을 잘 설정하느냐에 따라 이후 과정이 좌우된다. 부정과 분노가 심하고 길수록 사태는 더 나빠지기 마련이다.
리언 시걸 미국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은 역대 미국 정부가 북한 핵 협상을 중심으로 한 대북관계에서 보여주는 행위패턴에 이 다섯 단계를 적용했다. 이전 빌 클린턴 정부와 조지 부시 정부는 북한의 행태를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협상을 시도했으나 좌절했고, 지금의 버락 오바마 정부는 아직 분노 단계에 머문다.
오바마 정부가 지난 몇달간 북한 행태에 충격을 받은 건 분명하다. 대통령이 직접 장거리 로켓 발사 유예를 요청하고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베이징에 보내 방북 가능성을 타진했는데도, 북한은 모두 거부하고 로켓 발사에 이어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는 ‘북한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나’라는 분노의 표현이다. 북한의 위협을 “제멋대로 행동하는 10대들의 행동”이라고 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지난 20일 발언도 그 연장선에 있다.
분노가 꼭 정당한 근거에서 생기는 건 아니다. 현실에 눈과 귀를 닫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면 분노는 증폭된다. 출범 초기에 대규모 촛불집회에 놀란 이명박 정권은 우선 현실을 부정했고 다음에는 분노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강압적 통치양태의 배후에는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나’라는 심리가 깔려 있다. 최근의 ‘조문 민심’에 대한 강경대응 역시 이런 자폐적 분노의 일환이다.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된 뒤 엊그제 처음 한국을 방문한 커트 캠벨은 “북한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포괄적 패키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중대하고 불가역적인 조처를 취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분노를 넘어 협상 단계로 이행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미흡하다. 과거와 같은 좌절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패키지의 내용과 협상의 틀, 추진 방식 등에서 달라야 한다. 조기 협상 재개를 위한 노력도 필수다. 이전 정부들처럼 늦게 출발해서는 동력을 이어가기 어렵다.
이명박 정권 역시 최근 국면을 바꿔보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중도·실용이라는 말도 그런 고민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마음과는 동떨어져 있다. 지금 국면 전환에 필수적인 시금석이 있다. 하나는 쌍용차 사태와 용산참사의 해결이다. 정부가 적극 나서서 쌍용차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유도하고 용산참사 유족들의 눈물을 씻어준다면, 국민은 분명 정부를 새롭게 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언론관련법 강행 중단이다.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방송 진출 길을 여는 언론관련법에 집착하는 한, 정부가 민생보다 권력 유지·강화를 중시한다는 국민 인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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