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1 19:16
수정 : 2013.07.01 19:16
|
김지석 논설위원
|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신뢰외교’, 대북정책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이며, 30일 끝난 중국 방문의 슬로건도 ‘심신지려’(心信之旅·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다.
사람 사는 세상에 신뢰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제대로 된 신뢰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정치나 외교에서는 신뢰가 일종의 희소자원이다. 그래서 신뢰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과 함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호응을 얻어내려는 노력, 지속적인 실천력 등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머리와 마음과 손발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행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정권 출범 몇 달 만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대북 압박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애초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신뢰 형성을 통해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발전시키고,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것으로 제시됐다. 이에 맞춰 나온 내용들이 인도적 문제 실질적 해결, 당국 간 대화 추진 및 합의이행 제도화, 호혜적 교류협력의 질서있는 추진, 개성공단 국제화, 남북 관계 진전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 기여 등이다.
실제로는 딴판이다. 박 대통령은 중국 방문 마지막 날인 30일 ‘북한이 진정한 변화(핵 포기)를 향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해 남북 공동번영의 길을 열어갈 것’이라고 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최근 ‘남북 사이 신뢰를 쌓기 위해 우리 정부는 미봉책이 아닌 정공법으로 가야 하며 북한이 핵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것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핵심적 개념”이라고 했다. 신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왜소해지고 핵 포기가 앞쪽으로 나오면서 이전 정권의 대북정책과 비슷해지고 있는 것이다. 핵 포기를 전제로 한 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3000’은 결국 대결 강화로 이어졌다.
정부가 밀어붙인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신뢰보다 대결을 지향한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회담에서 채택한 10·4 정상선언에 대해 국민의 80%가 지지한 것은 남북 사이 신뢰를 크게 높일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회의록에 나오지도 않는 ‘노무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정치 공세의 도구로 삼았다. 남북 사이 신뢰는 물론이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신뢰 또한 깨졌다.
앞서 있었던 남북 당국회담 무산 과정도 마찬가지다. 북쪽이 장관급 회담 개최에 동의했을 때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개성공단 정상화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포함해 남북 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내는 신뢰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개성공단 가동 중단의 책임을 묻는 것을 포함해 북쪽의 ‘버릇을 고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립의 길이다. 정부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참석을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뒤쪽을 선택했음을 뜻한다. 그 결과 회담은 무산되고 불신은 더 깊어졌으며 개성공단은 장기 폐쇄 상태로 들어갔다. 정부는 이제 개성공단 문제를 풀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중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양쪽은 한국과 북한이 문제의 직접 당사자로서 당국 간 대화 등을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북 대화가 이렇게 거론된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남북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이뤄지는 한반도 관련국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우리가 매달리는 구조가 되기 쉽다.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나타난다. 우선 종합적인 판단력이 없다. 대통령을 포함해 불쑥불쑥 발언하는 사람은 있지만 판단 근거가 뭔지도 분명하지 않다. 신뢰를 얘기하면서도 신뢰를 키울 실천보다는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목소리가 앞선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나서서 왜곡된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포하면서 여론 관리를 한다.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 불신을 더 키우는 것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이미 머리와 마음이 실종된 ‘실뇌(失腦) 프로세스’가 되고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