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북쪽의 따뜻한 환대와 두 정상의 신뢰가 돋보였다. 그 속에서 남과 북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은 앞으로 한반도·동북아 정세를 이끄는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우선 양쪽은 비핵화-평화체제 열차의 핵심 엔진이 튼튼한 남북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북-미 관계가 이 열차를 잘 끌고 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비핵화에 관한 한 남북관계는 보조물에 그친다는 생각이 적잖았다. 이는 착각이었다. 북-미 관계는 6월 정상회담을 전환점으로 새 출발을 하자마자 길을 잃었고 그 책임을 두고 공방전까지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열차를 궤도 위에 다시 올려 동력을 제공하는 일이 시급하게 됐다. 이번 평양 정상회담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감시 수용과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이전보다 진전된 비핵화 조처를 약속했고, 미국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남북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통해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의 주춧돌을 놓은 일도 역사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일체 적대 행위의 전면 중지”가 촘촘하게 열거됐다. 판문점선언에서 밝힌 대로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 시작이다. ‘불가역적’이라 함은 어느 한쪽이 이를 되돌리려 할 때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또한 이번 합의는 다음 단계로 이끄는 길을 열고 그 내용을 사실상 확정한다는 점에서 ‘항구적’인 성격을 갖는다. 남북관계는 이제 모든 정세 변화를 규정하는 독립변수가 되고 있다. 과거처럼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정치·안보·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의 교류·협력이 남북관계의 내용을 채울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비핵화=북한과 미국이 풀어야 할 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양쪽 대화가 순조로웠다면 이 프레임이 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이하게 설정된 이 프레임은 처음부터 경직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선비핵화 요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고, 안전보장에 대한 북한의 우려 역시 줄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미국의 국내 상황 역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비핵화-평화체제 대화의 핵심 주체가 북한과 미국일 이유는 없다. 남북이 논의를 진전시킨 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보장을 받으면 된다. 북한이 한 걸음 먼저 비핵화 조처를 하고 그에 값하는 국제사회의 행동을 끌어내면 된다. 미국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볼 뚜렷한 근거도 없다. 북한이 가장 바라는 제재 완화·해제와 국제사회의 인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몫도 상당하다. 이번 합의는 이런 사고 틀 전환에 대한 일정한 답을 담고 있다. ‘한국이 보증하는 비핵화’와 ‘남북한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구축’이 핵심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의 신뢰가 없다면 이런 발상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평양공동선언은 남북의 합의이자 ‘문재인-김정은 합의’이기도 하다. 상황을 돌파하려는 두 사람의 고뇌 어린 결단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한반도의 최대 과제였던 ‘비핵화-평화체제’는 평창올림픽과 4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끝의 시작’ 국면에 진입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 국면을 마무리하는 ‘끝의 시작의 끝’에 해당한다.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았다. 끝의 끝을 끌어내기 위한 본격적인 접근이 그것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속도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여러 주체의 노력에 달렸다. 국제 상황은 녹록지 않다. 11월 초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주장이 불거지면서 미국은 유연성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중 무역갈등 또한 한반도 관련국들 사이의 협력을 제한한다. 어떤 경우든 주된 동력은 남북관계에서 나와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이제 일상화했다. 신선함은 떨어지더라도 내실은 커져야 한다. 두 정상의 신뢰와 우정(우의)은 앞으로도 든든한 밑천이 될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자세로 미국을 설득하고 관련국의 동의를 얻어내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파죽지세의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jkim@hani.co.kr
칼럼 |
[김지석 칼럼] ‘문재인-김정은 합의’ 이후의 한반도 |
대기자 북쪽의 따뜻한 환대와 두 정상의 신뢰가 돋보였다. 그 속에서 남과 북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은 앞으로 한반도·동북아 정세를 이끄는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우선 양쪽은 비핵화-평화체제 열차의 핵심 엔진이 튼튼한 남북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북-미 관계가 이 열차를 잘 끌고 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비핵화에 관한 한 남북관계는 보조물에 그친다는 생각이 적잖았다. 이는 착각이었다. 북-미 관계는 6월 정상회담을 전환점으로 새 출발을 하자마자 길을 잃었고 그 책임을 두고 공방전까지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열차를 궤도 위에 다시 올려 동력을 제공하는 일이 시급하게 됐다. 이번 평양 정상회담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감시 수용과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이전보다 진전된 비핵화 조처를 약속했고, 미국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남북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통해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의 주춧돌을 놓은 일도 역사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일체 적대 행위의 전면 중지”가 촘촘하게 열거됐다. 판문점선언에서 밝힌 대로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 시작이다. ‘불가역적’이라 함은 어느 한쪽이 이를 되돌리려 할 때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또한 이번 합의는 다음 단계로 이끄는 길을 열고 그 내용을 사실상 확정한다는 점에서 ‘항구적’인 성격을 갖는다. 남북관계는 이제 모든 정세 변화를 규정하는 독립변수가 되고 있다. 과거처럼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정치·안보·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의 교류·협력이 남북관계의 내용을 채울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비핵화=북한과 미국이 풀어야 할 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양쪽 대화가 순조로웠다면 이 프레임이 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이하게 설정된 이 프레임은 처음부터 경직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선비핵화 요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고, 안전보장에 대한 북한의 우려 역시 줄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미국의 국내 상황 역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비핵화-평화체제 대화의 핵심 주체가 북한과 미국일 이유는 없다. 남북이 논의를 진전시킨 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보장을 받으면 된다. 북한이 한 걸음 먼저 비핵화 조처를 하고 그에 값하는 국제사회의 행동을 끌어내면 된다. 미국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볼 뚜렷한 근거도 없다. 북한이 가장 바라는 제재 완화·해제와 국제사회의 인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몫도 상당하다. 이번 합의는 이런 사고 틀 전환에 대한 일정한 답을 담고 있다. ‘한국이 보증하는 비핵화’와 ‘남북한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구축’이 핵심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의 신뢰가 없다면 이런 발상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평양공동선언은 남북의 합의이자 ‘문재인-김정은 합의’이기도 하다. 상황을 돌파하려는 두 사람의 고뇌 어린 결단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한반도의 최대 과제였던 ‘비핵화-평화체제’는 평창올림픽과 4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끝의 시작’ 국면에 진입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 국면을 마무리하는 ‘끝의 시작의 끝’에 해당한다.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았다. 끝의 끝을 끌어내기 위한 본격적인 접근이 그것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속도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여러 주체의 노력에 달렸다. 국제 상황은 녹록지 않다. 11월 초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주장이 불거지면서 미국은 유연성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중 무역갈등 또한 한반도 관련국들 사이의 협력을 제한한다. 어떤 경우든 주된 동력은 남북관계에서 나와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이제 일상화했다. 신선함은 떨어지더라도 내실은 커져야 한다. 두 정상의 신뢰와 우정(우의)은 앞으로도 든든한 밑천이 될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자세로 미국을 설득하고 관련국의 동의를 얻어내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파죽지세의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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