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교착 상태인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의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때에 오는 11일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동안 북한 핵 문제가 해결될지 헤아릴 수 있는 회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월 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주된 이유는 미국이 골대를 옮기고 문턱을 높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골대에 해당하는 비핵화 목표를 “핵시설과 화학·생물학전 프로그램, 이와 관련한 이중 용도 역량, 즉 탄도미사일, 발사대, 관련 시설의 완전한 해체”로 명시한 문서를 북한에 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핵무기와 폭탄 연료의 미국 이전도 포함된다. 문턱은 위의 비핵화 목표를 전제로 한 과감한 조처다. 이제까지 언급된 영변 핵시설 해체·폐기에다 그에 못지않거나 더 큰 알파(α)를 더해야 비핵화 의지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미국은 압박한다. 결국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넘어 사실상 전면적으로 무장 해제를 해야 하며, 초기부터 항복하는 자세를 보여야 제재 완화·해제 등을 논의하겠다고 하는 셈이다. 미국이 이런 요구를 북한과 진지하게 협의하려 했다거나 북한이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래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키려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사실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임기 이후까지 내다보며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을 진전시켜야 할 동기가 약하다.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는 그의 재선 운동에 크게 유리할 게 없으며, 당장 미국 경제에 득이 되지도 않는다. 북한이 새로운 도발을 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서 적당한 긴장이 유지되는 쪽이 중국·러시아를 겨냥한 동아시아 전략을 펼쳐나가기에도 좋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 휘둘려선 안 된다. 새 출발을 한다는 자세로 협상의 토대를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중재자·촉진자를 자임하는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은 이전보다 좁아졌다. 크게 보면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다. 이를 전제로, 합의에 어떤 내용을 담고, 단계를 어떻게 나눠 실천하며, 합의·이행에 이르는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괄적 합의(일괄 타결)와 관련해 미국처럼 비핵화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비핵화는 말 그대로 비핵화여야 한다.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의 ‘검증 가능한 포기’를 명시한 9·19 공동성명이 좋은 모델이 된다. 유엔의 대북 제재도 주로 북한의 핵무기와 핵 계획에 대한 것이다. 화학·생물학전 프로그램과 중·단거리 미사일까지 대상에 포함하려 한다면, 비핵화 합의 자체가 이뤄질 수 없음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 핵에만 집중하더라도 일괄 타결이 쉽지는 않지만, 이미 여러 나라에서 비핵화를 한 전례가 있어 내용을 확정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포괄적 합의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이행 단계가 적어야 하는 점도 분명하다. 큰 두 단계를 기준으로 하되, 많아도 세 단계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첫 단계를 실천하면서 합의 내용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국제적 이행 체제를 구축한다면, 불가피하게 상당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 단계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은 신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초기 조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과 북한 정상이 몇 달 안에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했지만, 포괄적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만남은 이제 큰 의미가 없게 됐다. 지금 북한과 미국은 둘 다 상대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두 나라의 신뢰는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미국의 대북 무력시위 억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손쉬운 인도적 지원과 민간 교류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의 의지가 분명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태도다. 다양한 차원의 접촉과 실천이 없으면 신뢰도 생기지 않는다. 1차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상호 신뢰 형성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했다. 1년 반 남짓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생각하면 북한과 미국 사이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은 앞으로 한두 차례의 큰 기회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정국이 바뀌더라도 비핵화가 진전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러려면 그 전에 북한의 일관된 행동을 끌어낼 국제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새로운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촉진자에 더해 양쪽의 실천을 보장하는 외교력까지 요구받고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에 대해 강하면서도 내실 있는 외교가 필요한 시기다. jkim@hani.co.kr
칼럼 |
[김지석 칼럼] 새 출발 비핵화 협상, 강한 외교가 필수다 |
대기자 교착 상태인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의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때에 오는 11일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동안 북한 핵 문제가 해결될지 헤아릴 수 있는 회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월 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주된 이유는 미국이 골대를 옮기고 문턱을 높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골대에 해당하는 비핵화 목표를 “핵시설과 화학·생물학전 프로그램, 이와 관련한 이중 용도 역량, 즉 탄도미사일, 발사대, 관련 시설의 완전한 해체”로 명시한 문서를 북한에 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핵무기와 폭탄 연료의 미국 이전도 포함된다. 문턱은 위의 비핵화 목표를 전제로 한 과감한 조처다. 이제까지 언급된 영변 핵시설 해체·폐기에다 그에 못지않거나 더 큰 알파(α)를 더해야 비핵화 의지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미국은 압박한다. 결국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넘어 사실상 전면적으로 무장 해제를 해야 하며, 초기부터 항복하는 자세를 보여야 제재 완화·해제 등을 논의하겠다고 하는 셈이다. 미국이 이런 요구를 북한과 진지하게 협의하려 했다거나 북한이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래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키려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사실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임기 이후까지 내다보며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을 진전시켜야 할 동기가 약하다.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는 그의 재선 운동에 크게 유리할 게 없으며, 당장 미국 경제에 득이 되지도 않는다. 북한이 새로운 도발을 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서 적당한 긴장이 유지되는 쪽이 중국·러시아를 겨냥한 동아시아 전략을 펼쳐나가기에도 좋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 휘둘려선 안 된다. 새 출발을 한다는 자세로 협상의 토대를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중재자·촉진자를 자임하는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은 이전보다 좁아졌다. 크게 보면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다. 이를 전제로, 합의에 어떤 내용을 담고, 단계를 어떻게 나눠 실천하며, 합의·이행에 이르는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괄적 합의(일괄 타결)와 관련해 미국처럼 비핵화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비핵화는 말 그대로 비핵화여야 한다.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의 ‘검증 가능한 포기’를 명시한 9·19 공동성명이 좋은 모델이 된다. 유엔의 대북 제재도 주로 북한의 핵무기와 핵 계획에 대한 것이다. 화학·생물학전 프로그램과 중·단거리 미사일까지 대상에 포함하려 한다면, 비핵화 합의 자체가 이뤄질 수 없음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 핵에만 집중하더라도 일괄 타결이 쉽지는 않지만, 이미 여러 나라에서 비핵화를 한 전례가 있어 내용을 확정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포괄적 합의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이행 단계가 적어야 하는 점도 분명하다. 큰 두 단계를 기준으로 하되, 많아도 세 단계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첫 단계를 실천하면서 합의 내용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국제적 이행 체제를 구축한다면, 불가피하게 상당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 단계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은 신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초기 조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과 북한 정상이 몇 달 안에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했지만, 포괄적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만남은 이제 큰 의미가 없게 됐다. 지금 북한과 미국은 둘 다 상대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두 나라의 신뢰는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미국의 대북 무력시위 억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손쉬운 인도적 지원과 민간 교류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의 의지가 분명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태도다. 다양한 차원의 접촉과 실천이 없으면 신뢰도 생기지 않는다. 1차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상호 신뢰 형성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했다. 1년 반 남짓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생각하면 북한과 미국 사이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은 앞으로 한두 차례의 큰 기회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정국이 바뀌더라도 비핵화가 진전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러려면 그 전에 북한의 일관된 행동을 끌어낼 국제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새로운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촉진자에 더해 양쪽의 실천을 보장하는 외교력까지 요구받고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에 대해 강하면서도 내실 있는 외교가 필요한 시기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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