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05 15:00
수정 : 2014.11.0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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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날리기국민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대북삐라 날리기를 시도한 지난달 25일 오전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민통선 안 주민들이 대북삐라 살포를 막기 위해 트랙터로 길을 막고 있다. 파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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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긴강감 높여 중-미 사이에 줄타기 하려는 걸까
동북아 정세 불안 심각…그럴수록 남북관계 좋아야
김의겸의 우충좌돌 ③
삐라가 결국 남북 고위급 접촉을 날려버렸다. 남과 북 사이에 대통로는 고사하고 겨우 이어지고 있던 오솔길마저 끊길 판이다. 그 삐라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뿌린 거나 매한가지다. “단속할 실정법이 없다”고 선언해버렸으니 삐라 뿌리는 단체는 신이 났고, 경찰들은 날아가는 삐라를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왜 그러는 걸까? 정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말한 정부 스스로 겸연쩍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머리에 꽃 꽂고 색동저고리 입은 모습의 삐라를 뿌렸다고 화가를 체포한 정부니 말이다. 그렇다면 북한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으니 그런 혐의를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가 주권의 핵심인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기면서 그 이유로 든 게 북한의 엄청난 군사력이다. 그런 군사대국을 삐라 몇장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과대망상이다. 그도 아니라면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박 대통령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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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오후 청와대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와 환담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시켜 달라는 이씨의 요청에 ‘표현의 자유’를 들어 거절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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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자는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삐라는 북한에 날리지만 진짜 겨냥하는 건 미국과 중국이라고. 삐라를 뿌려 남북의 긴장 국면을 어느 정도 지속시키는 게 미국과 중국이라는 큰 나라를 대하는 데 편하다는 이론이다.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서 비슷한 사례를 들어보겠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위안부 문제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선 참으로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태까지 일본 아베 총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게 철저히 ‘대외용’이라는 거다. 엊그제 네덜란드 국왕을 만나서도 위안부 얘기를 꺼낼 정도로 국제사회에 대고 확성기를 틀지만 정작 가까이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없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청와대로 불러 밥 먹이고 악수를 하면서도 할머니들을 초청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할머니들이 만나달라고 부탁했건만 거절했다는 소리만 들린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짚이는 게 있다. 그건 위안부 문제를 ‘방패’ 삼아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에 엮이는 걸 최대한 늦추거나 동맹의 강도를 약하게 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 정부에게 일본과 손잡고 중국을 포위하는 데 앞장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허나 그 요구를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는 없다. 중국과의 무역 규모가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큰 현실에서 밥그릇을 차버리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미국 말을 못 들은 척할 수도 없다.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데가 미국 아닌가. 그러니 만만한 일본을 붙잡고 늘어지는 거다. 미국에 대고는 “일본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피해간다. 중국에게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게다가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아베 총리는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기 위해 일본 사회의 극우적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리려 하고 있다. 그런 아베로서는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사과하게 되면 자신의 존립 근거가 흔들린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아베가 건재한 게 오히려 다행인 셈이다. 위안부 문제가 인도적 차원이 아닌 외교적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삐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른바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이후 서서히 중국을 포위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둘러대는 이유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다. 일본을 군사대국으로 키우는 것도, 한국에 사드(THAAD)를 배치하는 것도 다 북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없이 북한과 가까워지면 미국의 명분을 빼앗아버리게 된다. 그러니 미국은 분명 남북 고위급 접촉 등의 흐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을 것이다. 지난달 4일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북한 고위급 인사 3인방이 갑자기 내려오자 얼떨결에 대화의 문을 열긴 했는데, 우리 정부가 그걸 뒤집자니 삐라만한 게 없었던 거다. 삐라를 살포하는 탈북자단체 여러 곳은 정부 지원금을 받고 있으니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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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30일 오후 강원도 원주비행장에서 열린 ‘국산전투기 에프에이50(FA-50) 전력화 기념식’에서 전투기에 올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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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를 뿌려 남북 간의 긴장이 유지돼야 중국에 대해서도 할 말이 생긴다. 중국은 점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면 한·중 관계는 파탄 날 것”이라고 을러댄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언젠가 중국이 실력 행사에 들어갈 수도 있다. 진짜 그렇게 되면 10여 년 전 ‘마늘 파동’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전작권 문제도, 무기 도입도, 한·미·일 삼각동맹도 모두 북한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이 적절한 선에서 계속 다퉈야 하는 것이다.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작은 나라를 끌고 가야 하는 박 대통령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니 이해 정도가 아니라 이리저리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 대통령에 대해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너무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더이상 통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위안부를 들고 나왔지만 결국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 결정을 내리면서 한·미·일 삼각동맹 편입이 사실상 결정됐다. 제 발로 걸어들어간 건지 끌려들어간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미국 편에 서게 됐고 그것도 맨 앞자리의 선봉이다. 그저 항상 있어왔던 국제적 긴장이 아니다. 1972년 닉슨과 마오쩌둥이 만난 이후 40년 넘게 지속돼 온 동북아의 평화가 깨질 판이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 간의 사이가 좋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한판 붙어보겠다는 데 말릴 힘은 없다. 그래도 한반도가 싸움터가 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 아무리 대국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라고 해도 해서 되는 게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미 1950년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서로를 학살하는 비극을 뼈저리게 치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삐라라니!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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