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2.03 18:27 수정 : 2014.12.03 21:57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2주기였던 지난해 12월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 주의, 안녕하십니까?’ 사진전에서 부인 인재근 의원이 사진 속 고인의 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고 김근태 3주기 추모전시 ‘생각하는 손’ 4일부터 열려
건강 허락했어도, 대통령 못되었겠지만…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야당 달라져 있을 것
정체성도 못 세우는 당의 진로 제시했을 것

연애도 정치도 ‘고뇌’의 연속…‘여의도 햄릿’ 별명
수첩엔 정치현안 ‘고민’ 흔적…양심과 원칙 중시
“일하는 사람 편에서 정치해야 한다” 상기하는 삶

김의겸의 우충좌돌 ⑥

3년 전 작고한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의 추모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 이부록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서울 연남동의 골목길을 돌고돌아 찾아간 작업실, 그 문을 열자 김근태의 냄새가 확 풍겨나왔다. 그가 신던 축구화와 구두, 아끼던 만년필과 안경, 각종 기술자격증, 원내대표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썼던 수첩 그리고 빛바랜 잡지와 단행본들. 서울 수유동 자택에 보관돼있던 것들 가운데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옥중 편지 묶음을 펼쳐봤다. 깨알같은 글씨가 가지런하게 빼곡하다. 간혹 틀린 글자가 있으면 반듯하게 두줄을 긋고는 그 좁은 여백에 더 작은 글씨를 채워나갔다.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편지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그가 받은 고문의 인상이 강렬해서일까. 그많은 편지 가운데서 유독 고문과 관련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편지에서 물고문을 ‘물공사’로 표현했다. “이곳에 들어와 보니 물공사 당한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소.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이렇소. 적극적으로 물을 마셔야 된다는 것이오. 질식, 고통, 공포를 그래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라는 것이오. 물론 팽만한 배가 되고 그러다 보면 의식이 가물가물 가게 된다오. 깨어나면 또 당하지만 몇 번 그러다 보면 종 칠 때가 다가온다는 것이오.” 그래 그렇게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며 고문 같은 세월을 버텨냈으리라.

다른 편지에서는 죽음을 맞닥뜨린 공포를 표현하기도 했다. 1985년 혹독한 고문을 받은 직후다. 늦은 밤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돌아올 때 그는 환영을 보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시커멓게 옻칠한 관의 윤곽은 불분명하였지만 아, 그것은 나에게 섬뜩하게 달려드는 것이었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생 시절의 김근태 노트와 옥중 편지다. 정갈한 글씨와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정리한 솜씨가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러고보니 그를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해 겨울 이른바 우리 ‘구속 학생’들이 서울구치소에서 단체로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하고 육중한 목욕탕 문이 열리더니 어느 사내가 알몸으로 들어왔다. 아니 질질 끌려왔다. 헐거운 몸피에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교도관 2~3명의 부축을 받으면서다. 목욕탕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아 김근태구나!” 아주 천천히 더운 물로 몸을 적신 뒤 그는 우리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그 처연한 눈빛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짐승 같은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그는 한 여자의 남자였다. 청년 김근태가 노동 현장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하던 시절 소음 속에서 ‘옥순씨’(부인 인재근 새정치연합 의원의 가명)에게 써내려간 연애편지는 그의 살가움을 느끼게 해준다. “옥순이와 뽀뽀를 하면 나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탐닉할 것 같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지. 빠져버리게 될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거야.” 편지를 읽으면서 슬그머니 웃음이 새나왔다. 김근태는 연애도 고뇌하면서 했구나 싶은 거다. 그의 고뇌하는 ‘버릇’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옥중 편지 한 대목도 그렇다. “선후배에 대한 호칭은 두가지 유형인테 이부영 선생처럼 후배들에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존칭을 쓰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선배들에게 아주 반말을 친숙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후자쪽을 선택하고 싶은데 그럴 경우 어떤 후배라도 말을 놓는 걸 용인해야 하고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야 할 것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지. 그런데 내 마음 속에서는 후배들이 나에게 그러는 것은 은연중 막고, 나만 선배들에게 반말을 하고 싶지. 이기적인 이런 마음 때문에 혼자 창피해 한 적이 여러번 있소.”

김근태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골프는 서민적이지도 않지만, 결국 정치인들이 접대를 받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대신 김근태는 축구를 즐겼다. 그가 신던 축구화다. 구두는 무좀 때문에 주로 망사구두를 신었다.
이런 풍모 덕에 그는 국회에 들어온 뒤 ‘여의도 햄릿’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는 어느 방향이 옳은지 항상 깊게 고민했다. 갈 길이 정해져도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함께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느라고 치고 나가야 할 때 치고 나가지 못해 몸놀림이 둔해 보였다. 맘이 모질지 못해 적군과 아군을 가르는 데 항상 주저주저했다. 그러니 선명해보이지 않았다. 한 대목이 떠오른다. 2001년 민주당에서 ‘동교동계’가 문제가 돼 이른바 정풍 운동이 거셌을 때다.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 앞장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김근태는 한발쯤 물러서 있었다. 천신정을 끌고가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으니 지지자들은 답답해 했다. 그러다 그가 모처럼 큰맘 먹고 당시 어느 월간지에 ‘작심 토로’를 했다. ‘동교동 해체’라는 과격한 요구도 내세웠다. 그런데 하필 그 인터뷰를 하던 날 미국에서 9·11테러가 터졌다. 모든 정치적 현안이 9·11테러의 잿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한참 뒤 어느 술 자리에서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던 말이 기억난다. “허허~ 난 누구 욕을 하면 안되는 팔자인가봐.”

그의 수첩에는 당시의 고민들이 담겨있다. 수첩 색깔이 노란 걸 보니 아마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인가보다. 당 의장 출마를 놓고 진지하게 검토한 흔적이 엿보인다. “출전해야 정치 리더십, 민주화운동 세력 성장/ 출마하지 않으면 약화” 하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다. 그러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당선 가능성 상대적 열세, 그러나 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음. 정치적 공격을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것 →천신정과의 대치선 설정 고려, 검토. 승산 여부 계산해봐야. 패배하면 큰 손실”

그 밖에도 그의 수첩 곳곳에는 당시의 정치 현안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도 적혀 있는데, 주로 문재인 수석이 회의에 참석해 전달한다. 맥락을 살펴보면 노 대통령은 10·26 사건의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규정하고자 했고, 민주화운동보상심위원회를 통해 계기를 마련하려고 한 듯하다. 정수장학회, 영남대, 경향신문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노력도 하는데, 부산 쪽 의원들이 참여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의원들이 조사·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어느날 총리 관저 모임을 기록한 수첩 내용에는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문제를 보고하며 ‘미국이 발목 잡을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대목도 나온다. 어느 언론사 기자들과의 만난 자리에서 들은 내용이 실명으로 적혀 있기도 하다. 어느 의원은 골프를 지나치게 많이 치고 어느 의원은 호화 술집을 출입한다는 내용 등이다. 김근태와 가까운 의원들도 거론됐는데, 그 의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궁금하다.

1979년에 딴 위험물취급기능사 1급 자격증. 김근태는 이런 자격증을 2002년 2월28일 다시 발부받는다.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려는 몸짓으로 해석된다.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의 기록들을 들추다보니 그의 정치 행로가 순탄치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그가 행복했을까 싶기도 하다. 오히려 그는 각종 ‘기술 자격증’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1970년대 청년 김근태는 고압가스 기계기능사, 태양열 집열기 시공기술요원, 열관리기사, 건설기계기사, 가스산업기사, 위험물관리산업기사, 위험물취급기능사 등 10여종의 기술 자격증을 땄다. 특이한 건 그가 이런 옛날 자격증을 2002년 2월28일 재교부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 눈에 익은 환하게 웃는 사진이 이 자격증에 실려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자격증에 그는 왜 애착을 보였을까. 정치적 효과를 바란다면 굳이 재교부를 받을 필요도 없이 옛날 것을 쓰면 되는데 말이다. 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하나의 ‘의례’라고 해석한다. 젊은 날 노트에 빼곡히 적혀 있던 그 치열한 문제의식을 잊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랬기에 그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놓고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며 대통령에게 달려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일찌감치 ‘작은 미국이 아니라 큰 스웨덴이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번 추모전도 주제가 ‘따뜻한 시장경제’다.

김근태의 안경과 만년필
건강이 허락했더라도 그가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과 원칙에 어긋난 행동은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던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야당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당의 생존보다는 자신의 국회의원 배지를 지키기 위해 분탕질을 치는 의원들이라도 그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또 당의 정체성을 놓고 초라한 깃발 하나 세우지 못하는 야당에게 그라면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기에 깊어지는 이 겨울 김근태가 그리워진다면, 그의 추모전에서나마 마음을 훈훈하게 데울 수 있을 것이다.

추모전 ‘생각하는 손’은 4일부터 21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갤러리문에서 열린다. 김근태 유품으로 작업을 한 작가 이부록은 전시회장 바닥에 지름 4m의 거대한 판옵티콘 문양을 만든 뒤 그 위에 서재를 재현할 계획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의겸의 우충좌돌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