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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07 10:32 수정 : 2015.01.11 15:50

‘싸구려 영화’ 한 편으로 대북 제재 나선 오바마의 숨은 의미
10년 전 사례와 묘하게 닮은 미국의 ‘한반도 냉기류 불어 넣기’
7·4 남북공동성명 이끌어냈던 아버지의 행보 깊게 검토해봐야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4년 11월 중국 베이징 ‘국가회의센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이징/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김의겸의 우충좌돌 ⑧

10년 전인 2005년 6자회담이 9·19 공동성명을 채택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종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모처럼 기자들과 어울려 저녁을 했다. 인수위 때부터 하루도 편치 않았던 한반도 외교안보의 최전선을 지켜온 그였기에 얼굴에는 항상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날만은 달랐다. 허리띠는 풀고 반주가 한 잔 들어가자 말수도 많아졌다. 은근슬쩍 자기자랑도 끼워넣었다. 9·19 공동성명이 성공적으로 나오게 된 데는 자신이 아이디어를 낸 ‘안중근 계획’이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안중근 계획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남쪽 전력 200만 킬로와트를 직접 보낸다는 내용으로 공동성명에 들어가 있었다. 대개 그런 공치사는 귀에 거슬리기 마련인데 그날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9·19 공동성명은 60년 분단체제를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넘어서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엄청난 내용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씨앗을 뿌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결실을 맺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9·19 공동성명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른바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사건 때문이다. 북한이 이 은행을 통해 불법자금을 세탁하고 있다고 미국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이 달러를 위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석 전 사무차장이 지난해 5월 펴낸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를 보면, 그가 BDA를 처음 접하게 된 건 9·19 공동성명 탄생 이틀 전이다. 주미한국대사관이 짤막한 외교전문 한 통을 보낸 것이다. “왠지 기분이 찜찜했”지만 “그 정도는 미국 정부 안에서 충분히 조정을 하지 않겠느냐”고 낙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가 9·19 공동성명을 유린하고 남북이 2005년 가을로 잠정 합의한 남북정상회담마저 무산시켜 버린 괴물로 커지고 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빈약했다. 북한이 구입한 화폐용 시변색(視變色) 잉크 등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그것은 달러 위조의 가능성을 말해줄 수는 있어도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북한의 위조행위를 입증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몇차례나 협조 요청을 한 것만 봐도 심증만 있지 물증을 확보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는 게 그의 회고 내용이다. 게다가 중국 정부의 조사 결과는 “북한의 돈 세탁 관련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으며, 다만 몇차례 걸쳐 현금을 대량으로 인출하는 등 다소 규정에 어긋나는 정도의 거래 내역만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도 그동안 큰소리 치던 달러 위조의 증거는 제시하고 못하고 2007년 6월 북한의 BDA 자금 2500만 달러의 동결을 해제해 북한에 돌려주는 것으로 사태는 막을 내렸다. 이 장관은 책에서 “도대체 미국이 BDA 사건을 이처럼 유야무야 할 것이었으면 왜 소중한 9·19 공동성명을 파괴하며 그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뜬금없이 오래 전 기억과 회고록을 들춘 이유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소니픽처스 해킹과 관련해 대북 제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 제재로 새해들어 빠른 기류 변화를 보이던 남북관계에 제동이 걸린 모양새가 BDA 사건을 연상시킨다. 소니픽처스의 해킹은 북한 소행이 아니라 회사에 불만을 품고 퇴사한 전직 직원들의 소행이라는 미 사이버업체의 조사 결과가 나온 걸 보면 실체가 없기는 BDA 사건이나 소니픽처스 해킹이나 도긴개긴이다. 다른 점이라면 BDA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거고 소니픽처스는 아예 싹을 잘라버린 셈이다. 

사실 따져보면 오바마 대통령이 한반도에 냉기류를 불어넣은 게 이번만은 아니다. 지난해 3~4월과 8월 두차례나 이어진 한미군사훈련의 강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혈맹인 미국이 남북대화를 꺼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런 희망을 자꾸만 밀어내고 있다. 요즘은 오바마의 얼굴이 점점 부시를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국 워싱턴에서 한 여성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암살을 다룬 코미디 영화 를 구글 플레이 구매 페이지에서 보고 있다. 소니픽처스는 이 영화를 이날 온라인을 통해 공개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오바마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얼마전 <한겨레>에 쓴 칼럼 ‘전략적 인내의 민낯이 드러났다’에서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옮겨보면 이렇다. “미국이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시간을 끌면, 그 ‘틈새시간’에 북한은 결국 핵보유국이 된다. 북한이 핵탄두 몇 개 가져봤자 미국에는 별 위협이 안 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는 절대 위협이 된다. 특히 북한에 핵멱살 잡히면, 한국은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전긍긍하면서 대미 안보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 미국 무기시장은 확장되고 북한을 빙자한 중국 견제도 강화할 수 있다.” 

미국은 이른바 ‘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이후 서서히 중국을 포위해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둘러대는 이유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다. 일본을 군사대국으로 키우는 것도, 한국에 사드(THAAD)를 배치하는 것도 다 북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없이 북한과 가까워지면 미국의 명분을 빼앗아버리게 된다. 게다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동북아지역에서 군사력을 강화하지 못하고 우리정부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도 요구하기 어렵다. 그러니 미국은 소니픽처스 해킹 건으로 우리 정부에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이다. 싸구려 영화 한편으로 무기도 팔고 중국도 견제하는 일석이조다. BDA 사건 하나로 9·19 공동성명도 무력화하고 남북정상회담도 날려버린 거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의 이런 깊숙한 태클을 어떻게 피해가야 할까? 정세현 전 장관은 5일 라디오에 출연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동맹국끼리 왜 이러느냐, 임기 3년 차로 들어가면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뭔가 나도 업적을 남겨야 되는데 (너희들이) 인권문제에 더해서 해킹 문제까지 들고 나오면 북·미 관계가 복잡해지고, 이렇게 되면 남북 관계가 ‘순풍에 돛단 듯이 갈 수 없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는 또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멈춰 달라 하는 식으로 간곡하게 부탁을 하면 아마 미국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꼭 이렇게 얘기했다. 2005년 11월 부시를 만나 대놓고 문제를 제기했다. “9·19 공동성명 직후 BDA 사건이 발생한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묻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다르다. 박 대통령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건 비현실적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당분간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래도 중요한 건 북한을 대화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과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과정을 한번 깊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7·4 공동성명은 남북한이 남북대화와 독재 권력의 공고화라는 비슷한 형태로 빗나가버리는 바람에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판’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시점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지금 되씹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김영주 위원장에게 보낸 편지 한토막은 이렇다. “아시아의 상황은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변했다. 특히 미-소 양극체제와 미-소-중-일 4강 관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적 과제들을 미국이나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수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됐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대화가 시작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권헌익·정병호 저 <극장국가 북한>)

물론 그때는 대결 상태였던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로 전환하는 격변기였다. 지금은 거꾸로 미-중 관계가 협력에서 대결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 더 어려운 건 맞다. 하지만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의 처지가 요동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때 민족의 이익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결론이 ‘미국이나 일본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수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주변에서 갈등의 파고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간 대화의 필요성은 과거보다 훨씬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 대화는 성장의 동력을 찾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남쪽 경제가 활로를 찾을 수 있는 돌파구라는 점에서도 유용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한 ‘대박’을 현실화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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