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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11 09:58 수정 : 2015.03.13 15:36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중동 4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공항에서 곧바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문병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김의겸의 우충좌돌 13]
‘리퍼트 습격’ 김기종이 “한미 군사훈련 중단” 외쳤다고
이번 기회에 ‘반전·평화’의 입을 아예 틀어막겠다는 건가

11cm. 손가락으로 오른쪽 뺨을 조심스레 내리 그어본다. 섬뜩함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길이다. 3cm. 엄지를 입 안에 넣어 검지와 닿는 부분의 두께를 느껴본다. 세포 하나하나가 오싹해지는 아득한 깊이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한다는 것쯤은 익히 알 만큼 나도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도 분위기 안 맞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부 여당이 지나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규정했다. 그러더니 “반미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 극단적인 주장과 행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도 “우리 사회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거든다.

‘한미 군사훈련 중단’은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김기종이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졸지에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구호가 되고 말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더니 정부는 이번 기회에 ‘반전·평화’를 외치는 입을 아예 틀어막겠다는 심산인가 보다.(▷ 관련기사 : 여당, 대사 피습 틈타 테러방지법·사드 밀어붙이기) 하지만 과거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시킨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군인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짧아도 40년 길면 60년이 다 된 한미 군사훈련에서 딱 한번 있었던 1992년의 중단이다.

미국이 한반도 내 핵탄두를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 계기가 됐다. 물꼬는 미국 정부가 텄지만 북한과의 대화에 자신감과 의지를 갖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인 건 노태우 정부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미 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은 한미 군사훈련(당시는 팀 스피리트) 중단까지는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요구해 성사시켰다. 노태우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팀 스피티트 훈련은) 남북 대화의 진전에 따라 실시여부를 결정한다’는 한국 측 의사에 따르겠다고 미국 측이 1992년 팀 스피리트에 대해 신축성 있는 입장을 표명해 와 우리 측 정치적 결단이 중요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한미 훈련 중단됐던 노태우 때 남북대화 활발

도널드 그레그 당시 주한 미 대사도 몇 년 전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저는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있을 때부터 북한이 얼마나 팀 스피리트 훈련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팀 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에 중요한 동력이 됐습니다.”

1992년 약속대로 팀 스피리트 훈련은 열리지 않았다. 그 결과 1992년 한 해는 건국 이래 가장 많은 남북대화(88회)가 열린 해로 기록됐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부터 이명박 정부 때까지 약 42년 동안 열린 회담 횟수가 606회인 점을 감안하면 1992년 한 해가 얼마나 분주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세라도 녹을 것 같던 얼음장은 1993년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로 순식간에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1992년 가을 미국과 한국의 국방장관이 만나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장악력이 떨어진 틈을 이용한 양국 ‘군부’의 독주였다.

미군이 지난해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의 핵심인 사드(THAAD·고고도 요격 미사일)를 시험 발사하고 있다. 출처 미국 국방부 미사일방어청
1993년 3월 재개된 팀 스피리트 훈련에는 한국군 7만, 미군 5만이 참여했으며 해외에서 1만9천명의 미군이 추가로 투입됐다. 북한의 김정일은 바로 “한반도 북부를 선제 기습공격하기 위한 핵전쟁 연습”으로 이를 규정짓고 전 인민과 군에 “전시 준비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동시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결정한 특별 핵사찰 수용 불가 입장을 반복해 알렸다. 그리고 팀 스피리트 훈련 도중인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그레그 대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제가 주한 미국대사로 있었던 기간 동안 미국 정부가 내린 최악의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이 이 결정의 책임자였습니다. 저와는 전혀 협의가 없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앞서 2년간 진척된 거의 모든 일들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레그 전 미 대사 “팀 스피리트 재개, 최악의 결정”

한미 군사훈련은 북한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곤궁을 가속시키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얘기를 들어보면, 북한의 원유수입량 가운데 적어도 10% 많으면 40%를 군부가 쓰고 있어 북한의 인민경제를 담당하는 노동당 재정경리부는 죽을 맛이라고 한다. 그래도 한미가 코앞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고 있으니 북한도 두 달 가까이 이에 대응하느라 어쩔 수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한다.

리퍼트 대사는 이런 흉변을 당하고도 “같이 갑시다”라며 우리 국민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리퍼트 대사가 그 대인배의 모습을 휴전선 넘어 한반도 북쪽에도 보이면 어떨까.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핵을 철수하고 군사훈련을 중단시킨 그레그 대사의 뒤를 밟을 수는 없을까.

평생을 북한과 대치하고, 쿠데타까지 일으킨 노태우 대통령도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시키고 남북 대화의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남북철도를 복원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이 입증되려면 군사훈련부터 중단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주문을 하는 게 너무 가혹하고 비현실적인 주문이 되고 말 테지만 말이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법조예능-불타는 감자#2] 리퍼트 대사 피습과 한국판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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